WAVES

KEY WORD : 돌고 돌아
Something more
important than LOVE
눈을 감는다. 기억의 시작점에는 항상 김민규가 있다. 멋대로 빨간색 지붕 나무 블록을 가져간 김민규는 자기가 만든 멋들어진 3층 성 위에 올려놓고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내가 애써 잘 지은 집이라 칭찬받는 게 한계인 작은 성에 두려고 준비했던 것이었다. 그대로 일어나 김민규를 밀치고 김민규가 만든 성을 부쉈다. 김민규는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들었고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둘렀다. 지지 않고 짧은 머리끄덩이를 당기고 귀를 물었다. 선생님들이 떼어도 한참을 씩씩거리다 결국 너 나 할 거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김민규가 그 성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안다. 정말로 멋진 성이었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칭찬해주고 싶었는데.
눈을 뜨면 어릴 적 젖은 감자 같은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날카로운 선으로 깎여져 있었다. 땡볕에서 꽤나 고생해 일했다고 들었는데 안 그래도 어두운 피부가 더 탔다. 덥다고 짧게 친 머리 덕에 작도기로 그린 듯한 이목구비가 훤히 드러났다. 김민규가 피식 웃었다. 양주를 홀짝거리는 손동작이 익숙했다. 그거 너 덕분에 만든 거잖아. 딴 애들은 하나도 안 빌려줬는데. 너만. 내가 엄청 큰 성 짓겠답시고 나댔을 때. 애들 다 자기 블록 숨기기 급급할 때 네가 줬잖아. 자기 거로 만들라고. 그래서 난 그거까지 내 건 줄 안 거지. 바보같이. 네 몫도 분명 필요했는데. 낮은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나는 떨떠름하게 과일 안주를 집어 먹었다. 김민규는 분명 저걸 내 술버릇쯤으로 여기고 있을 게 뻔하다. 대답해주는 말씨가 애를 달래는 것과 비슷하다. 눈빛에서 애정을 읽는다. 김민규는 내가 취한 줄 안다. 자신의 마음을 술김에 기억하지 못하길 바란다. 그게 내가 원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바보 김민규.
넌 결국 중요한 건 주지 않잖아. 헤어질 때마다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였다. 여자든 남자든 국한되지 않고 말이다. 전 연인들은 그걸 사랑이라고 명명하진 않았다. 나 역시도 거기에 동의했다. 사랑을 안 준 적은 없다. 항상 넘치도록 사랑을 퍼부었다.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한편으로 억울하기도 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내게 그 어떤 것을 주었는가? 모르겠다. 내가 그걸 바란 적도 없는 게 문제인 건가. 깊은 생각에 빠질 때면 김민규가 박치기를 빡 날린다. 촌스러운 밤색 교복이 흙먼지로 더러웠다. 주위에서 싸워라! 싸워라! 환호성이 들린다. 난 그 기대에 힘입어 마찬가지로 김민규 이마에 냅다 내 머리를 박는다. 돌덩이가 깨지는 소리가 난다. 양측에서 코피가 주르륵 샌다. 당시에 촌스러운 까까머리였던 우리는 서로의 못난 얼굴을 보자마자 숨넘어가도록 웃었다. 이제 싸움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누가 더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찍는지 대결하며 핸드폰 카메라 버튼을 연신 눌러댔다. 핸드폰을 다섯 번은 넘게 바꾸면서도 그 사진들은 빠지지 않고 메모리에 저장됐다. 김민규 부적. 이석민 부적. 딱히 효력은 없고 웃음만 보장되는 부적. 간죽간살 김민규 인스타를 탐방하다 왠지 모르게 멜랑꼴리한 기분에 휩싸이면 바로 톡을 보낸다. 나 이거 인스타에 올릴 거임. 그럼 1분도 채 되지 않아 김민규로부터 답이 온다. 야. 야 석민아. 우리. 이러지 말자. 서로에게 치명상이다. ㅇㅋ? 내가 반응을 하지 않으면 쿨하던 답변은 사라지고 매달리기 시작한다. 그걸 보면서 낄낄 웃다 보면 이별의 상처는 말끔하게 씻겨진다. 아 나 진짜 재수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날 쳐다보는 김민규의 시선에 우정 말고 다른 무언가가 섞이기 시작한 건. 처음엔 기시감인 줄 알았다. 나는 눈치가 좋은 편이 아니니까. 게다가 당시의 나는 인간관계에 있어 예민하던 시기였으므로 내 인생 가장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존재했다. 부모님이나 누나, 김민규 외 두어 명의 친구들.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김민규는 내 친한 친구 무리 중 하나에 불과했다. 좀 더 솔직하게 굴자면 무리 중에서도 특별했다. 그렇다고 그게 친구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난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우정에 기인해서. 첫 연애는 상대에게 엄청 휘둘리는 연애였다. 1살 위였던 여자 선배는 먼저 고백하고 내 대답이 예스로만 나오도록 닦달했다. 당시에 주위에서 부추기는 함성이 얼른 그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이내 소리만 더 커지는 결과만 초래했다. 선배는 나를 정말로 키링 내지는 자랑할만한 어떤 물건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학창 시절 노래를 잘 부르는 밴드부 보컬이라는 위치는 꽤나 메리트가 있었으므로 선배는 낯가리는 내 성격은 본 체도 안 하고 이곳저곳에 끌고 다니기 바빴다. 노래 한 번만 불러주라 응? 여친 소원인데 그것도 못 해주냐? 오오 진짜 잘 부르네. 막 자랑할 만큼은 아닌데? 에이 내가 낫지. 찬사와 평가와 놀림과 웃음이 한 데 모여 그 즈음 노래는 내게 어려운 것이 됐다.
노골적인 뒷담화를 들었다. 선배의 친구들한테. 그리고 선배한테. 일주일 동안 끙끙 앓다 선배에게 이별을 고했다. 선배는 그 무리에 둘러싸여 울었다. 진짜 울고 싶은 건 나였는데. 김민규 외 두어 명의 친구들이 날 달랬다. 나는 속없이 웃었다. 그렇게 됐어어… 말끝을 늘이며 힐끔 김민규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부러 김민규에게 이러한 일들을 알리지 않았다. 김민규는 관심도 없다는 양 핸드폰 하기 바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김민규도 만만치 않게 인기가 많았으므로 하루에도 수십 개의 연락이 왔다. 밴드부에 얼굴마담으로만 세워놓자고 나보고 좀 꼬셔보라는 얘기도 종종 들었다. 그게 왜 그리도 마음에 안 들던지. 단숨에 미간이 구겨졌다. 야 너는 친구가 실연당했는데 그러고 있냐? 네가 찼다며. 그래도 실연은 실연이잖아. 됐다 너 차이고 왔으면 뭐 욕이라도 해주려 했는데, 아니면 됐어. 기이한 답을 끝으로 김민규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재수 없는 놈. 지는 발에 차이는 게 매달리는 사람들이다 이거지. 떡볶이 먹으러 가자 내가 쏠게.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하는데 김민규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쟤 왜 저래 저거. 나는 오늘 패스. 미친 드디어 내일 세상이 멸망하냐? 뭐래 할 일 있어서 먼저 간다. 먹을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김민규가 쿨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입만 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척이나 간과한 것이다. 김민규가 가진 힘을 말이다. 다가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만큼 아는 정보가 늘어난다는 소리였다. 언제 놀이동산이 할인한다며 같이 가자고 한 것도 뮤지컬 티켓 초대권을 덥석 받아온 것도 일면식도 없는 아는 형누나의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 공짜 밥을 얻어먹는 것도 심지어는 미자도 늦도록 머무를 수 있는 피씨방이나 노래방 따위의 아지트를 찾은 것도 그러한 힘이었다. 선배가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넓은 커뮤니티를 자랑하는 김민규는 내가 당한 일들을 이미 모조리 알고 있었다. 야 이거 김민규 아님?
연락을 받고 노래방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학생들이 담배 피는 것도 눈 감아주는 곳이라 양아치들에게 아지트가 된 지하 노래방에선 괴성이 난무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노래방 주인은 일진 애들이 자주 벌이는 패싸움이라며 없는 셈 치고 폰게임이나 하고 있었다. 열받아서 카운터에 비치된 강냉이 바구니를 엎었다. 안쪽 룸에서 욕설이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왔다. 열린 문을 통해 엎어진 탁자와 음료수와 널브러진 과자봉지들이 날 반겼다. 그리고 소파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김민규와 유독 선배가 자주 만나던 썬 오빠가 보였다. 선배가 썬 오빠라고만 불렀기에 진짜 이름은 몰랐지만 좆고딩과 싸울 깜냥은 아니란 건 알았다. 심지어 얼굴이 푸르딩딩 부어 누가 봐도 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김민규 상태가 멀쩡한 것도 아니라서 소리부터 악 질렀다. 다시금 썬 오빠에게 주먹을 내리꽂으려는 자세를 취한 김민규 등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주위 사람들은 뭐하기에 말리지도 않고 있나 했더니 익숙한 얼굴의 남자 둘은 이미 몇 대 얻어맞고 뻗은 상태였고 남은 한 명은 구석에서 핸드폰으로 촬영 중이었다. 선배였다.
말조심해라 이석민한테. 김민규는 끝까지 씩씩대면서 으르렁 내뱉었다. 미친새끼. 또라이. 개또라이미친새끼. 온갖 욕지거리가 김민규 뒤로 졸졸 따랐다. 선배는 고함을 내지르며 얼른 썩 꺼지라고 마이크를 내던졌다. 김민규가 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어두운 곳에서도 피가 섞였음이 보여 기절할 뻔했다. 같이 온 친구와 함께 김민규를 어떻게든 질질 끌어 밖으로 빼 왔다. 바깥 햇빛 아래서 보니 그 잘생긴 얼굴이 아주 가관이라 분노가 솟구쳤다. 주먹으로 갑빠를 내리쳤다. 아프다며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김민규에 이번엔 눈물이 났다. 막을 새도 없이 펑펑 쏟아졌다. 야아 왜 울고 그르냐아…. 김민규가 엉거주춤 안기에 정강이 쪼인트를 깠다. 누가 너한테 이딴 거 해 달랬냐고. 그렇다고 정강이를 차냐 아오 존나 아프네. 씨발 그러니까 아픈 일을 왜 사서 해 왜! 급기야 가방을 벗어 등판을 후드려 패댔다. 아 미안하다고! 니가 나한테 왜 미안한데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딴 친구는 질린다는 듯 자리를 피한지 오래였고 김민규만 내 곁에 남아 쪽팔림을 나눠 가졌다. 그만 울어어. 석민아 응? 울지 마 석민아. 석민아. 이석민.
우리 사장님은 다 좋은데 게이인 게 분명해. 쿨럭. 마시던 커피를 그대로 내뱉는다. 어머 부사장님한테 하는 말은 아니었는데. 부사장은 무슨 일회용 낙하산인데. 그래도 프로젝트 하는 동안은 부사장님 맞잖아요. 벌써 연차로 따지면 같이 일한 지 4년이 넘어가는 정팀장님이 핸드폰 화면을 대뜸 내게 보여준다. 김민규와의 카톡창. 거기엔 창과 방패의 싸움이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 몸 갖고 게이인 건 유죄 아니야? … 모르죠 그 성향인지 아닌지는. 모르긴 뭘 몰라 딱 봐도 그렇구만 나 같은 여자를 놓치는 게 말이 돼? 저희 사업 파트너로서만 열심히 일합시다. 괜찮아 부사장님은 취향 아니니까. 그럼 김민규 취향도 팀장님이 아닌가 보죠. 그건 딱 봐도 알아 사장님 취향 부사장님이잖아. 켈럭켈럭. 정팀장님은 꼭 내가 뭘 먹거나 마실 때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는 재주가 있다.
어머머머 순진하게 모른다는 듯 눈 깜빡이는 거 봐. 여기 현장 좀만 봐도 아는걸. 사장님 취향이 눈치 없는 사람인가? 남들 다 뙤약볕에서 일할 때 이온음료며 수건이며 헬멧이며 간이의자까지 챙겨주는 거 부사장님밖에 없는데. 이건 진짜 모르면 유죄지 유죄야. 회식도 부사장님 좋아하는 삼겹살집만 가잖아요. 우리도 소 좀 먹자 소 좀! 다른 현장 봐봐 점심으로 삼겹살 먹는다니까? 건물을 100층 넘게 지으면 뭐 해. 소 한 마리도 안 주는 더러운 회사!
거 더러운 회사라 미안합니다? 사장님 언제 오셨어용? 정팀장님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코맹맹이로 바뀐다. 어차피 들킬 아양이건만 정팀장님 노력도 대단했다. 작업복 어깨가 찢어져 새로 받으러 왔다는 말에 노트북을 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 다친 거야? 물으니 그냥 튀어나온 철제에 걸려 찢겼단다. 황급히 벗겨내고 민소매 위로 드러난 어깨를 더듬는다. 자꾸 숨기려는 몸짓에 더 고집스럽게 헤집었다. 상처 없고. 멍도 없고. 거짓말은 아닌가 보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곤 캐비닛에서 새 작업복을 꺼내 주려는데 어째 공기가 묘하다. 텅. 캐비닛 문소리만이 이 적막을 메운다. 힐긋 정팀장님 쪽을 보니 요상하게 씰룩거리는 입꼬리가 어쩐지 좀 껄끄럽다. 손가락이 콕콕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제야 김민규의 빨개진 귀 끝이 눈에 들어온다. 작업복을 뺏어 드는 근육이 꿈틀거린다. 햇빛에 그을린 줄 알았더니 발그스름한 피부가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라고 은근히 드러낸다. 고맙다. 내 머리를 부스스 흩트리고선 김민규가 빠르게 사무실을 나간다. 잠시의 정적이 흐른다. 제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정팀장님의 눈매는 풀릴 기세가 없다. 솔직히 말해봐요 부사장님도 게이죠?
나 사실 남자랑도 잔 적 있어. 그건 김민규가 날 유난스럽게 챙겼던 시기에 참지 못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내 인간관계였지만 항상 김민규는 저가 먼저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는 듯이 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석민 친구 면접관 김민규. 김민규가 오케이 결제 사인을 해야지만 이석민 바운더리에 들어올 수 있었다. 단언컨대 그건 내가 원한 바가 아니었다. 철저히 김민규가 바란 거였지. 날 위한다는 말로 뻔뻔하게 주장하는 녀석은 놀라울 만큼 당당했다. 실제로 날 위한 것도 맞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은 곤란했다. 애인도 검사받으라는 건 선 넘었다. 예전 선배의 일을 들먹이며 말하는 꼴이 내 방아쇠를 당겼다. 네가 아는 것보다 나는 훨씬 자랐다고 인간관계 하나둘에 상처받아서 엉엉 울던 어린 시절과는 다르다고.
의도와는 달리 그 말을 내뱉고선 곧바로 후회했다. 그건 생전 처음 보는 김민규의 눈이었다. 슬픈 거 같기도 했고. 화난 거 같기도 했고. 둘 다인 거 같기도 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차마 안 나왔다. 아니 내가 왜 미안해 해야 돼? 그 생각이 더 강하기도 했다. 김민규가 벌떡 일어났다. 내 자취방을 나가려는 듯 외투를 입는 모습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제야 내가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인정했다. 이대로 김민규가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덜컥 눈앞까지 다가온 형체가 뚜렷한 두려움에 온몸이 발발 떨렸다. 따질 것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끅끅거리면서도 미안하단 말은 내뱉지 못했다. 김민규는 여전히 내게 등을 보인 채였다. 서러움에 몸을 웅크리고 펑펑 울었다. 발소리가 나지 않는 것만이 그나마 안도감을 주었다. 너 진짜 못됐다. 결국 김민규는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곁을 지켰다.
김민규 말이 맞다. 나는 천하의 나쁜 놈이다. 김민규가 날 친구 이상으로 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당시 그 말은 실은 나한테 더 다가오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누군가의 경고는 누군가에겐 창이다. 대차게 찌르고 후벼판 주제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해서 선택한 게 도망이었다. 기가 막힌다. 내가 도망치면 김민규가 찾아올 거니까. 정확했다. 김민규는 나를 찾아서 질질 끌고 데려왔다. 미안해 그냥 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놀라서 그랬어 네가 싫어진 게 아니야. 김민규는 회피를 택했다. 오로지 이석민을 위해. 자신의 행동을 아웃팅한 친구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부하길 바랐다. 그게 이석민이 원한 바였으므로 그랬다. 김민규의 애정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무시하자니 거대했고 받아들이자니 무서웠다. 우리 친구잖아. 그딴 소리를 또 되는대로 지껄이며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걸 알아서 김민규는 이석민이 또 도망칠 구석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자기 마음을 죽였다. 최악이다. 나는 거기에 큰 안락함을 느꼈다. 김민규가 쌓아 올리고 단단하게 굳힌 아늑한 둥지에 막연히 잠을 청했다.
잠에서 깨도 꿈이 아니었음을 둥지 안에서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게 벌써 7년 전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둥지 안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와 김민규가 키스하는 모습은 익숙하다. 보란 듯이 하는 일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내가 운이 나쁜 거다. 현장에서 일이 끝나고 어깨 아프다고 곡소리를 해대기에 집에 파스 들고 찾아갔더니 그러고 있더라. 어 이건 그 분한테 붙여달라 해라 하하. 안 식는 게 이상한 대사였다. 대략 세 번 정도 본 남자들은 전부 날 닮았다. 음 이번엔 코 쪽이 닮았네. 그런 거까지 뜯어 볼 여유가 됐다. 아파트를 벗어나기도 전에 김민규한테 잡혔다. 헉헉거리며 잡힌 손마저 익숙한 것이다. 아니 그게 있잖아…. 나한테 변명할 필요도 없는데 꼭 그렇게 한다. 괜찮다고 다시 가보라고 말하면 이미 그 사람은 보냈다고 답한다. 그런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괜히 머쓱해진다. 음 그럼 밥이라도 같이 먹을까? 술도. 콜.
이석민 아웃팅에는 울고불고 오바쌈바를 다 떨었으면서 김민규 아웃팅엔 놀라울 정도로 태연하게 대하는 자세가 모순적인 것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한다. 대학교 과방에서도 그랬고 대학로 술집 근처에서도 그랬고 이사 오기 전 집에서도 그랬듯이. 편안함이 지속된다. 편안함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든다. 이게 맞는 거다. 술을 기울이며 목구멍이 다 보이도록 웃는다. 으하학 뒤집어지는 내 모습을 보곤 김민규는 으으 진저리를 치며 뒤로 물러난다. 그 모습이 뭔가 마음에 안 들어 술잔을 탁 내려놓다가 소주가 넘친다. 둥근 테이블을 따라 흐른 술이 하얀 티셔츠를 약간 적신다. 으이구 칠칠맞긴. 타박하는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김민규가 망설임 하나 없이 다가온다. 물티슈로 손수 벅벅 닦아주곤 언제 가져온 건지 일회용 앞치마도 머리에 끼워준다.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감자튀김까지 내 입에 넣어주고 제 술잔을 잡는 김민규는 더더욱 마음에 안 든다. 내가 애도 아니고. 부루퉁하게 입술이 나온다. 김민규 저거 내 그런 마음을 다 알 거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 그게 김민규가 나에게 부리는 최대 욕심이다. 손에 닿는 곳에 있어. 암묵적인 동의가 이뤄진 해당 사항은 어쩌면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다. 기실 김민규의 욕심은 내 반의반도 되지 않을 거다. 김민규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추악한 마음이 걔를 붙들고 놔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결국 내 곁을 떠나지 않는 너 때문이라고 잘못을 떠넘긴다. 너 그거 마시면 주량 넘기잖아 나 줘. 봐봐 이렇게 취해서 실수할 여지도 주지 않는 김민규 탓이라며 걔 말은 듣지도 않고 소주잔을 털어 넣는다. 고집불통. 누가 할 소릴.
김일김수. 김민규가 일치고 김민규가 수습한다. 과 내에서 제법 유명한 사자성어였다. 김민규가 무슨 사고를 치면 또 어느샌가 김민규가 알아서 다 수습해왔다. 오지랖은 또 더럽게 넓어서 남일김수 라는 사자성어까지 파생되었다. 남이 벌인 일까지 김민규가 수습한다. 거기서 남의 비중에 이석민이 80퍼센트 이상 가담하고 있는 건 구태여 지적할 필요도 없었다. 신경 쓰지 말라는 이석민의 말에 진짜 신경 쓰지 않으면 개삐친다는 걸 옛적에 파악을 다 끝낸 김민규는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아 다만 명확한 선을 그어서. 흙탕물 튄 신발을 바꿔준다거나 잊고 온 팀 과제를 챙겨준다거나 축제에서 서빙 담당 겸 얼굴마담이었던 녀석이 어느새 옆에서 같이 꼬치를 만들고 있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선 그은 거 맞아? 그런 의심의 눈초리를 스스로 보냈다가 역시 스스로 눈을 가린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친구끼리 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이건. 그래 설령 내가 전 애인들과 헤어지고 술 처먹고 새벽에 김민규를 부르는 것도. 강압적이던 성격의 동아리 선배가 억지로 룸클럽으로 끌고 가려던 걸 김민규가 영웅처럼 등장해 구해주는 것도. 고열이 난 날 김민규가 제 데이트 약속 파토 내고 달려온 것도. 전부. 선을 지킨 거다.
따지고 보면 김민규의 잘못이었다. 내가 떼를 써서 정해놓은 선을 꼬치꼬치 따져 물어 고치면 되는 걸 상관없다는 듯이 굴어서 그런다. 나도 완벽한 어린애는 아니라 괜히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옆구리를 콕콕 찌르노라면 김민규는 그냥 으하하 웃고 만다. 너 이렇게 여려서 어떻게 살래 진짜루. 참나 어이가 없어서 누가 할 소릴 호구 김민규. 너한테만 그런 거야 너만. 그게 문제라는 걸 알면서 끝내 입을 꾹 다문다. 난 여전히 김민규가 만든 울타리 밖으로 떠날 생각이 없고 영원한 건 절대 없다는 세상에서 이것만큼은 영원하다고 믿고 있다. 이석민 옆에 김민규. 김민규 옆에 이석민. 하필이면 오른손잡이 왼손잡이로 나란히 서서 손을 잡기 알맞아서. 키는 더럽게 큰 놈이라 기대기 편안해서. 와중에 또 나한테 맞춘답시고 몸을 낮추는 게 당연해서. 그 모든 게 완벽해서. 또 눈을 감는다. 눈을 떠도 제자리겠지. 김민규가 네 친구, 애인, 부모, 원수, 은인이야? 소리를 들으며 수많은 사랑을 떠나보냈더라도 반드시 말이다.
현장에 사고가 났어요 부사장님 빨리 와보셔야 할 거 같아요 사장님이…. 정류장에 알맞게 멈추는 버스를 저주하다 무작정 내려 뛰기 시작한다. 숨이 턱턱 막힌다. 골목을 돌아 간신히 호흡을 고른다. 허리를 숙이곤 헛구역질을 토해낸다. 김민규가 병원으로 이송됐다. 머리부터 심장까지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땅바닥이 출렁거리며 기이한 진동을 만들어낸다. 쭈그려 앉아 흔들거리는 다리를 끌어안고 어느새 터진 눈물에 파묻혀 소리 없는 후회를 쏟아낸다. 진짜로 내 옆에서 김민규가 사라져버리면 어떡해? 사실 그런 상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김민규가 누군가와 다정히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야기할 때마다 그 좆같은 키스를 마주할 때마다 다짐했다. 김민규가 애인이 생기면, 결혼을 하면, 날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땐 웃으며 보내줘야지. 축하해줘야지. 진짜 친구로서 안아줘야지. 거짓으로 점철된 진심을 새기고 또 새겼다. 근데 아니잖아. 김민규가 내가 상상한 것 중 단 하나도 하지 않았잖아. 애인보다 나랑 노는 게 더 좋다며. 나 결혼할 때까진 절대 결혼 못할 거 같다며. 김민규가 먼저 그랬잖아. 지가 지 팔자 꼰 거잖아. 나한테 그딴 기대를 심어준 게 너잖아. 걱정 마 네가 무서워하는 거 안 해 절대. 바보 같은 김민규는 그걸 고백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내가 사실 당시 생각했던 건 네가 더는 날 사랑하지 않는 거였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김민규를 보고 있기란 힘들다. 머리에 둘둘 감아진 붕대 위로 피가 살짝 젖어있다. 간신히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핑 돈다. 김민규가 보면 킥킥 웃으며 못생긴 얼굴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게 났다. 조용한 김민규는 견딜 수 없다. 심정으론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일어나라고 하고 싶은데 실상 하는 짓은 손을 꼭 마주 잡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덜덜 떨린다. 그나마 낮은 층에서 다행히도 빈 플라스틱 함이 떨어져 운 좋게도 머리에 직통이 아닌 비스듬히 맞았다고. 개중에 나쁜 소식은 헬멧을 벗고 있었다는 정도였다. 하필이면 휴식 시간이라 잔소리를 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사장이라는 새끼가 만날지 몸 안 사리고 뛰니까 이 사단이 나지. 그래놓곤 일용직 대타 뛴다고 내가 현장에 나가면 온갖 호들갑은 다 떨어댔다. 난 위험해서 안 된다고? 넌 이제 나한테 죽어도 그런 말 못할 줄 알아. 어이쿠 환자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끄응 김민규가 찬찬히 몸을 일으킨다. 다 듣고 있었냐고 볼멘소리를 하면 아프긴 아픈지 피식 웃는 얼굴이 희멀겋다. 누구누구씨가 제 손을 휴지 대신으로 쓰고 계셔서요. 그러면서도 김민규는 그 투박한 손으로 내 얼굴을 닦았다. 양볼이 꾸욱꾸욱 눌린다. 못생긴 얼굴. 김민규가 킥킥 웃는다.
“민규야.”
“응?”
“너 빨간색 블록 기억해? 왜 지붕 모양으로 생긴 거.”
“설마 오는 길에 술 마셨냐?”
“기억하냐고.”
“당연히 하지.”
“그거 너 줄게.”
“….”
“그거 너한테 줄게 민규야.”
“야 이석민.”
“네 거야.”
눈을 뜨면 거기엔 마침내 완성된 김민규의 성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