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S

KEY WORD : 이 밤은 짧고 넌 당연하지 않아
이 밤은 짧고 넌 당연하지 않으니까
헤어진 전 연인으로부터 전화가 오고 있었다.
민규는 차마 받지도 끊지도 못한 채 오도카니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연락할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게다가 먼저 연락을 해온 쪽이 석민이라는 사실에 더 얼떨떨한 기분이 됐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장장 8년을 이어온 장기연애였다. 그래서인지 헤어진 직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단호히 끊어내지 못한 채 한 동안은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다.
핑계거리를 만들기는 참 쉬웠다. 예전에 빌렸던 티셔츠, 집에 두고 간 카메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에어팟... 그것들을 전해준다는 이유로 종종 만남이 계속됐다. 근데 헤어진 사이에 이러는게 맞나? 서서히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석민이 조심스럽게 제의를 해왔다. 앞으로는 뭐가 나오든 각자 버리든지 갖든지 알아서 정리하자고.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연락할 명분 같은게 없었다. 애초에 먼저 그 명분의 싹을 잘라버린 것이 석민이다. 최근 몇 달간은 바쁘게 일만 하면서 지내느라 애인과 헤어졌다는 사실도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지라 민규는 더욱 더 석민의 전화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끝내 연락처를 삭제하면서도 차단까지는 차마 누르지 못한 자신에게도 지금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을 것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잠시 고민하던 그가 수신버튼을 꾸욱 눌렀다.
"...여보세요?"
[아, 민규야. 나 석민인데...]
"알아. 왜 전화했어?"
[.....]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민규는 괜히 간지러운 기분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심지어는 숨소리마저도 익숙했다. 연애할 당시에는 몇 시간씩 통화를 이어가던 일도 잦았으니까. 하지만 익숙하면서도 또 낯선 느낌이다. 그게... 석민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더니 이내 다시 이어갔다.
[우리 가을에 여행가기로 했던 거 있었잖아.]
가만히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고있던 민규의 눈동자가 점차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잊었지? 비행기랑 숙소 예약은 물론이고 여행 계획까지 전부 다 짜놓고선. 황급히 데스크에 있는 달력의 페이지를 넘겨 확인했다. 여행일까지 고작 3주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헤어진 직후에 바로 취소했으면 무료 취소도 가능했을테다. 지금 취소하면 수수료 폭탄일게 분명했지만... 아까워도 어쩔 수 없었다. 까먹은 게 죄였다.
"아. 맞다... 잊고 있었네."
[.....]
"그 때 결제 전부 내 카드로 했었지? 환불처리 하고 내가 다시..."
[아니, 그게 아니라....]
석민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만 고요히 오고갔다. 그가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여. 민규가 정적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떼려던 찰나였다.
[아, 그러니까 그거 말인데. 그냥.... 갈래?]
".....어?"
잘못 들었나. 민규가 벙찐 얼굴로 눈을 꿈뻑였다.
"...그냥 가자는게,"
[아니이.... 취소하면 돈 거의 못 돌려 받기도 하고. 우리 연초에 휴가도 미리 내서 일정 싹 비워놓은데다... 여행 계획도 열심히 짰잖아.]
석민이 변명하듯 늘어놓는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여행 계획 짠다고 몇 번이나 싸웠는지 셀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싸웠어도 일정을 짜는 그 과정이 한 없이 설레게 느껴졌던 건 그만큼 두 사람 다 여행에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기에 그랬다. 특가를 찾는다고 매일같이 사이트를 들여다보고, 숙소 후기를 몇 백개씩 정독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치만,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는 헤어졌는데 같이 여행을 간다는게 말이 되나.
"가고 싶으면 혼자라도 가도 돼. 내 것만 취소할테니까..."
[너도 가고 싶어했잖아.]
"....."
[이탈리아 가보는 게 소원이라며.]
여행지를 이탈리아로 정했던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유럽 여행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난히 여행이 기다려졌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라고 하면 1순위로 이탈리아 여행을 적었던 민규였기에. 솔직히 석민이 방금 이 여행에 대해 다시 일깨워줬을 때 민규는 적잖이 놀랐다. 내가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던거지. 그만큼 우리의 이별의 충격이 세긴 했나보다.
캘린더에 빨간색으로 강조 표시된 'Italy'라는 글씨를 보고 있으니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솔직히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
[같이 가자.]
석민은 다시 한 번 확고한 목소리로 민규에게 권유했다. 애초에 이미 마음을 완전히 정한 상태로 전화를 걸었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그는 평소에는 겁도 많으면서 한 번씩 무모하게 행동할 때가 있었다. 연애할 당시에는 그 점이 참 골때리고 좋았는데... 정말이지 헤어지고 나서도 이럴 줄은 몰랐다.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절로난다. 민규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석민이 무의식적으로 네번째 손가락 마디를 매만졌다. 비어있는 손가락이 오늘따라 허전한 기분이다. 그는 괜히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했다. 슬쩍 옆자리에 앉은 민규를 쳐다본다. 새삼 깨지도 않고 참 잘 잔다 싶었다. 민규는 기내식 먹을 때를 제외하곤 정말 거짓 보탬없이 비행하는 내내 쭉 내리 잠을 잤다.
"...잠이 오냐."
"....."
하필 비행기가 만석이라 좌석 변경이 불가능했다. 꼼짝없이 나란히 앉아 장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 그치만 따지고보면 그다지 큰 일은 아니다. 여행도 같이 가는 마당에 비행기 옆자리인게 뭐 별 거인 건가 싶었다. 어차피 자리만 붙어있을 뿐 각자 시간을 보낼텐데.
그치만 석민의 예상에 민규가 기절하듯이 잠만 자는 시나리오는 없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덕분에 좀 편하게 오기는 했으나, 또 얘가 잠을 너무 심하게 잘 자니까 괜히 얄미운 마음도 드는게 참 아이러니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만도 했다. 석민은 민규가 신경 쓰여 잠을 설쳤으니까.
이래서야 첫 날 관광을 잘 할 수 있을지... 예정된 일정을 다 소화하지 못한 채 일찍 숙소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하품을 길게 늘어뜨린 석민이 등받이에 기대누웠다. 이제는 대놓고 자고 있는 민규의 얼굴을 구경했다. 어차피 누가 업어가도 모를만큼 깊게 잠든 것 같으니.
곧 착륙할 예정이니 등받이를 바로 해달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잠시 고민하던 석민은 민규의 어깨를 톡톡 쳤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승무원 분이 깨워주시긴 하겠지만... 일단은 일행으로 같이 가는데 이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큰 의미는 없었다. 승무원 분의 수고를 덜어주고픈 배려라고 해두자.
"김민규. 이제 인나야 할 거 같은데?"
"으응..."
"착륙 준비 하래."
그 말에 민규가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빗으며 몸을 일으켰다. 잠이 아직 덜깼는지 멍한 얼굴로 앉아있던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주섬주섬 가방에 보조배터리와 안대를 넣으며 주변을 정리했다. 석민은 고개를 돌려 창 쪽을 바라봤다. 내내 하늘로 가득 차있던 창문 밖 풍경에도 드디어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탈리아에 왔다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이 났다.
날씨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짐을 찾고 입국 수속을 마친 후 밖으로 나오니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두 사람은 숙소 주변까지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이동했다. 어쩌다보니 기차에서도 또 나란히 옆자리였다. 석민은 아까 비행기에서 좀처럼 자질 못해서 뒤늦게 졸음이 몰려오는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자꾸만 하품을 했다.
"졸리면 자도 돼."
그 모습을 본 민규가 넌지시 말했다. 도착할 때 쯤 깨워줄게. 눈 좀 붙여. 목적지인 테르미니 역까지는 대략 30분 정도가 걸렸다. 쪽잠을 자기에는 나름 괜찮은 시간이었다. 석민은 그에 괜찮다고 답하며 민규의 호의를 거절하긴 했으나, 물리적으로 점차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기가 힘들었다.
자그마한 머리통이 위아래로 꾸벅꾸벅 움직인다. 석민은 졸다가 한 번씩 놀라 발작하듯 깨는 행위를 반복했다. 보는 사람이 다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모양새다. 잘 거면 그냥 좀 편하게 자지... 결국 민규는 조심스레 그의 머리를 받쳐들고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제서야 석민은 보다 편안한 얼굴로 깊게 잠들었다.
그에게서는 익숙한 체취가 났다. 석민과 닮은 포근하고 달콤한 향. 같은 바디워시나 섬유유연제를 써도 저와는 다른 향이 나는게 신기해서 매일같이 끌어안은채 코를 박고 킁킁 대던 날들이 있었다. 기분이 좀 묘했다. 전남친과 여행을 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다시 깨닫는다. 정말 미친 짓임은 분명한 일이다.
내릴 때 쯤에 깨워주겠다고 했었는데, 석민은 그 전에 알아서 먼저 잠을 깼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민규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닫고 파드득 놀라 머리통을 떼어냈다. 미안... 석민은 창피한지 얼굴을 조금 붉힌 채로 사과를 해왔다. 잠결이라 민규가 기대게 한 것은 기억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잘못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민규는 굳이 정정을 해주지 않았다. 괜찮아.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지 뭐. 오히려 뻔뻔하게 그런 말이나 했다. 석민은 아까보다 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쪽팔리게 전남친 어깨에 기대서 자다니... 혹시 추접스럽게 잠꼬대하고 그러진 않았겠지? 석민은 꺼진 핸드폰 액정 화면을 통해 슬쩍 제 얼굴 상태를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고 민규는 결국 웃음을 참는 것에 실패했다.
"걱정 마. 침 안 흘렸어."
"그거 확인한거 아니거든....!"
"어쨌든."
하지만 침을 안 흘렸다는 말에도 혼자 계속 신경이 쓰였던건지 석민은 기어코 민규의 눈치를 보며 몰래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민규는 그 모습마저 목격하고 말았지만. 여기서 더 웃으면 진짜로 화를 낼 것 같아 그는 유리창에 시선을 고정하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야했다.
터미널에 도착한 두 사람은 들뜬 마음으로 짐가방을 들고 하차했다. 숙소까지는 조금 걸어야했다. 눈 앞에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에 두 사람 다 이 순간만큼은 어색함이나 불편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로마의 거리를 눈으로 담아내고, 또 카메라로도 담아냈다. 숙소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자 안락해보이는 침대가 두 개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미리 전화해서 더블 베드로 변경해둔 것이었다.
물론 방을 새로 하나 더 잡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하긴 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추가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새로 잡은 방과 기존의 방 컨디션이 똑같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렇게 되면 누가 어떤 방을 쓸 건지 정하기도 애매해져서 그냥 같이 쓰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서로의 예민한 점을 잘 아니까 그런 면에서는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일정은 하루씩 바꿔 다니기로 했다. 석민이 오늘 1일차 일정을 가면, 민규는 2일차 일정을 먼저 가는 식이었다. 일정 변경은 각자의 자유지만 상대방의 일정도 고려해 동선이 겹치지만 않게끔 하기로 미리 약속했다. 이렇게 하면 그냥 숙소만 공유하는 각자의 배낭여행이 되는 셈이다.
1일차는 이탈리아 도착 시간을 고려하여 짜인 일정이었지만, 2일차는 원래 아침일찍부터 시작하는 일정이라 지금 당장 출발해도 시간이 좀 빠듯했다. 민규는 간단하게 카메라와 지갑 등만 챙겨 서두르듯 먼저 방을 나섰다. 반면에 석민은 조금 여유가 있어서 일단 숙소 주변부터 둘러볼 계획이었다.
혼자하는 여행은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나름 재미가 있었다. 지나가다보니 줄을 길게 늘어선 샌드위치 가게가 보여 호기심에 따라 줄을 섰다. 현지어로 적힌 메뉴판을 읽을 수가 없어서 그냥 주인분께 추천하는 재료와 소스를 넣어 알아서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제법 맛있어보이는 샌드위치가 나왔다. 먹기 전에 사진을 두어 장 찍고 한 입 베어물었다.
"와... 너무 맛있는데?"
석민은 감동 받은 얼굴로 샌드위치를 쳐다봤다. 오바 좀 보태서 인생 샌드위치 등극이었다.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가게인지 알 것 같았다. 숙소 가까운데 이런 곳이 있었다니. 미리 찾아 본 곳도 아닌데 우연히 맛집을 찾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트레비 분수와 콜로세움도 구경하고, 젤라또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서 먹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달함에 석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무래도 여행 내내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젤라또를 사먹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조금 걷다보니 쇼핑을 하기 좋은 스팟도 발견했다. 마침 신발이 조금 불편하여 발이 아파오던 참이라 즉흥적으로 신발 가게에 들어갔다.
너무 비싼 신발은 좀 그런데... 여행 때만 며칠 신고 말 것 같아서 적당히 싸 보이는 것으로 골랐다. 12유로? 엄청 싸네. 운 좋게 귀여운 샌들을 2만원도 안하는 가격에 구입을 했다. 곧바로 신발을 바꿔 신었다. 원래 신었던 운동화보다 발이 훨씬 편했다. 또 한참을 걷다보니 기념품 샵이 눈에 띄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석민은 자연스레 가게 안으로 홀려 들어갔다.
솔직히 구경만 해도 충분히 즐거웠지만 그래도 이런데 놀러 왔으면 기념품을 안 살 수가 없다는 생각에 열심히 물건을 골랐다. 여러 후보가 있었지만 무난하게 마그네틱이 선택됐다. 이것도 귀엽고... 저것도 귀여운데. 결국 하나만 선택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다섯 개나 사버렸다. 그래도 기분은 최고였다.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치고 숙소로 들어왔다. 민규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편하게 씻고 나와 머리도 말리고 쇼핑한 것들을 캐리어에 하나씩 넣어 정리했다. 석민은 마그네틱을 포장된 그대로 캐리어에 넣었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꺼내 포장을 뜯었다. 슬쩍 민규 쪽 침대를 바라봤다. 많이 샀는데 얘도 하나 줄까...?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결국 하나를 집어들어 민규의 침대 위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석민이 잠들고 난 뒤, 민규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숙소로 귀가했다. 그는 혹여나 석민이 깰까봐 머리도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씻고 불이 꺼진 채로 이동했다. 잘 준비를 모두 마치고 침대에 누운 민규가 등 뒤에 느껴지는 딱딱한 무언가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으로 빛을 비춰 확인해보니 작은 마그네틱이었다.
"...쟤가 준건가?"
그렇겠지. 아무래도 여기에는 나랑 쟤밖에 없으니까. 민규는 작은 불빛에 의지하여 이리저리 마그네틱을 살펴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꼭 지같은 거 사왔네. 가방에 앞주머니에 마그네틱을 찔러넣고 다시 침대에 편하게 누웠다.
요새 불면증이 심했는데 이상하게 비행기에서부터 잠이 잘 오는 기분이다. 민규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잠시 고개를 돌려 석민 쪽을 바라봤다. 오랜기간 만났던 사이라 그런가... 걱정과는 달리 석민과의 재회가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민규는 이 여행이 꽤나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는다. 곧 방 안에 두 사람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가득찼다. 이탈리아에서의 첫 날 밤이 평온하게 지나고 있었다.
어느덧 여행은 4일차에 이르렀다.
민규는 여행을 갈까 말까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너무나 흠뻑 빠진채 이탈리아를 즐기고 있었다. 자전거를 빌려서 돌아다녀보기도 하고, 축구를 하고 있던 현지 아이들의 무리에 껴서 같이 놀기도 하고, 혼자 여행을 온 한국인을 우연히 만나 친해져 연락처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쯤 되면 혼자하는 여행이 체질이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게 기분 좋다. 민규는 주변 눈치 보지 않고 길바닥에 앉아서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유명한 관광지를 구경하는 것도 재밌고 별다른 것 없이 그냥 거리를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안 왔으면 어쩔 뻔했지. 잠시 고민했던 것이 우습게 느껴질만큼 이번 여행이 주는 만족도가 컸다. 일단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석민과는 부딪힐 일이 없었다. 민규는 느즈막히 일정을 시작해 밤 늦게 돌아왔고, 석민은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즈음 돌아오는 편이다보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레 계속 서로가 자는 모습만 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라이프스타일이 다른데 어떻게 그리 오랜시간 같이 살았나 새삼 신기하기도 했다.
젤라또를 다 먹고 나서는 다시 또 걷기 시작했다. 골목에는 작고 귀여운 가게들이 잔뜩 있었다. 지나가다가 시식을 해보라는 직원의 권유에 민규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직원이 건넨 것은 작은 초콜릿 조각이었다. 민규는 예쁘게 웃으며 감사인사를 하고, 한 입에 초콜릿을 삼켰다. 녹차의 씁쓸함과 초콜릿의 달달함이 조화롭게 입 안에서 섞여나갔다.
아... 이 집 영업 잘하네. 그냥 맛만 보려고 했는데 홀라당 영업 당해서 계획에 없던 초콜릿을 한바가지 샀다. 맛 별로 하나씩 샀는데 사고보니까 너무 많이 산 거 같기도 했다. 뭐, 그냥 여기저기 선물로 돌리면 되겠지.
대충 선물을 돌릴 사람들의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본다. 그러다 문득 석민이 생각났다. 걔도 단 거 엄청 좋아하는데... 마침 마그네틱 선물 받은 것도 있겠다 답례로 초콜릿 정도는 줄 수 있지 않나. 결국 리스트의 끄트머리에 석민의 이름이 추가됐다.
민규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내일은 먼 거리를 이동해야해서 아침 일찍부터 출발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체력을 아껴두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다.
카드 키를 찍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안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엇, 잠시만..."
석민이 다급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민규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방에 들어온 상태였다. 석민은 씻고 나온 지 얼마 안됐는지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과 품이 큰 반팔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지를 안 입고 속옷만 입고 있던 거다. 예상치 못하게 석민의 맨 다리와 마주한 민규가 당황하여 급히 뒤를 돌았다.
아니, 근데 이렇게까지 내외할 일인가? 아예 빨개 벗은것도 아니고 남자끼리 그냥 다리 좀 보이는게 뭐 대수라고. 석민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너무 당황해하니까 민규도 덩달아 당황했다. 이제 뒤 돌아도 돼... 기어가는 목소리에 다시 뒤를 도니 반바지를 챙겨입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인 석민이 보였다.
....반바지가 왜 이렇게 짧아? 솔직히 아까랑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 민규는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렸다. 왜 민망하지. 몇 년을 물고 빨던 다리인데. 아, 이렇게 말하니까 더 이상하네. 방 안의 공기가 좀 덥게 느껴졌다. 석민도 똑같이 느꼈는지 시뻘개진 얼굴 그대로 꼬물거리며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크흠, 불 꺼줄까?"
"아냐... 너 할 거 해. 나중에 꺼도 되니까..."
민규는 석민의 뒷모습을 한 번 보고 속옷과 갈아입을 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정말 방금 씻었는지 화장실 안은 아직 수증기로 가득 차있었다. 이석민 냄새 나잖아... 아, 나 진짜 미쳤나? 민규는 찬 물을 틀고서 그대로 제 머리를 집어넣었다. 정신 차리자.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찬 물로 샤워를 마쳤다.
씻고 나오니까 석민은 불을 켠 그대로 고롱고롱 잠에 들어있었다. 민규는 그가 깨지 않게 드라이기를 챙겨 화장실에 들어갔다. 머리를 다 말리고 나서는 민규도 이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잠이 안왔다.
머릿 속으로 양도 세어보고 숨을 최대한 고르게 쉬며 명상도 해보고 다 해봤지만 헛수고였다. 민규는 한참을 뒤척이며 괴로워했다. 이렇게 되면 일찍 들어온 보람이 없었다. 새벽까지 도저히 잠이 안 와서 그는 냉장고에 들어있던 맥주를 한 캔 따서 원샷하고 다시 누웠다. 다행히 취기가 살짝 도니까 눈이 조금씩 감겼다. 그렇게 힘겹게 잠에 들었다.
그리고나서는 아주 푹 잤다.
아니, 자버렸다는 표현이 맞았다.
민규는 애써 맞춰놓은 알람들을 하나도 듣지 못하고 느즈막히 눈을 떴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그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늦잠으로 인해 전날 계획했던 것들이 전부 어그러져버렸다. 오후 일정이라도 소화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옆 침대에 볼록한 인영이 보였다.
...얘가 왜 아직도 숙소에 있지? 잘못 본건가 싶어서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정오가 넘은 시각이었다. 피곤했나? 아침 잠이 없는 편이라 늘 여행을 가면 혼자서라도 조식을 챙겨먹던 석민이 답지 않게 늦잠이다. 어제 일찍 잔 것 같았는데. 민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했으나 이내 몸을 일으키며 나갈 준비를 했다.
알아서 하겠지. 신경쓰지 말자. 그러면서도 민규는 자꾸만 시선이 석민의 쪽으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솔직히 신경이 쓰인다. 무지하게. 저처럼 알람을 못 듣고 늦잠을 자고 있는건가 싶어 일부러 헛기침을 크게 하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내봤다. 의도한것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실수로 드라이기를 바닥에 떨어뜨려서 꽤 큰 소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석민은 주변의 소란스러움에도 새우처럼 등을 구부린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없었다. 이 쯤 했으면 자신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깨는 거면 그냥 더 자고 싶은 거겠지. 민규는 이불에 폭 쌓여있는 석민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배가 고파서 기차역으로 가기 전 먼저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그냥 아무 곳이나 들어간 거라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음식이 너무 예쁘게 플레이팅 된 채로 나와서 작게 감탄했다.
"아, 카메라..."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숙소에 카메라를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뭐가 허전하더라니. 아쉬운대로 핸드폰으로 카메라를 켜서 두어장 찍었다. 밥을 먹으면서 오후 일정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은 그냥 내일 일정으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쉬운대로 로마 근교의 작은 소도시를 구경하고 오는 계획을 세웠다. 2시간이면 충분히 다 구경할 수 있다고 하니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 민규는 잠시 고민했다. 카메라를 가지러 갔다 올까. 사진이야 핸드폰으로 찍을 수도 있다. 하루 정도 사진을 안 찍는어도 크게 상관 없기도 했다. 근데 거기 예쁜 건물 많던데. 숙소까지 되돌아가는데 시간 얼마 걸리지도 않고... 민규는 고민 끝에 결국 카메라를 가지러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카드키를 찍고 들어간 방에는 여전히 석민이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 그대로 이불에 파묻혀있었다. 아직도 안갔다고? 밥도 안먹고 저렇게 쭉 자는건가. 힐끔 그 모습을 본 민규가 애써 외면하며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는 조심조심 카메라만 챙겨서 다시 방을 나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 씨...."
민규는 방을 나서기 위해 문고리까지 잡았다가 멈칫하고 다시 걸음을 돌렸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거다. 다른 때도 아니고 먼 이탈리아까지 와서 이렇게 이유없이 늑장을 부릴 애가 아닌데. 조심스레 그가 누워있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이석민. 이름을 불렀는데도 미동이 없었다.
민규가 이불 끄트머리를 잡고 끌어내렸다. 그러자 석민이 작게 움찔하며 그런 민규의 손을 제지했다. 깨어있구나. 자는 것도 아니라면 혹시 몸이 안 좋은건가? 그 예상을 적중하기라도하듯 붙잡은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억지로 힘을 주어 이불을 치워내자 울었는지 푹 젖은 석민의 얼굴이 보인다.
"야, 너 어디 아파?"
황급히 그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 본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어디가 아픈데. 말을 해줘야 알지. 달래는듯한 말투에 석민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답을 해왔다. 배가 아파서... 젖은 속눈썹을 힘겹게 깜빡거리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민규는 우선 한국에서 챙겨운 진통제를 가지고 와 석민에게 먹였다.
"잠시만..."
민규가 석민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배를 어루만졌다. 윗배가 특히 차가웠다. 체한건가? 일단 소화제 같은 걸 좀 먹여야할 거 같은데. 분명 아침부터 쭉 굶었을게 분명한 애한테 빈 속에 약을 먹인 것도 뒤늦게 좀 신경쓰인다. 이탈리아에 죽 같은 것도 팔려나... 계속해서 석민의 배를 살살 쓸어주며 민규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석민은 아픈 와중에도 제 배를 쓸어내리는 민규의 손길이 좀 민망했는지 팔목을 붙잡아 제지했다.
"괜찮아..."
"배가 이렇게 차가운데 뭐가 괜찮아."
"약도 먹었고, 좀 체한 거 같은데 곧 가라앉겠지... 나 신경 쓰지 말고 놀다 와."
석민은 아예 반대쪽으로 돌아 누운 뒤 다시 눈을 감았다. 제법 단호한 태도였다. 민규는 조금 당황하여 허공에 손을 올린채 굳었다. 몸이 안 좋은 날이면 계속 같이 있어달라 어리광을 부리던 석민이었다. 물론 헤어졌으니까 태도가 달라지는건 당연하겠지만... 이렇게 아파하면서 도와달라는 한 마디 없는건 솔직히 미련했다. 민규는 한숨을 내쉬며 쭈구리고 있던 무릎을 폈다.
"나갔다 올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눈을 감으니 청각이 더 예민해진다. 석민은 가만히 귀로 민규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부스럭거리며 방 안을 돌아다니는 게 다시 외출할 준비를 하는 듯 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제서야 완전한 고요가 찾아왔다. 석민이 작게 한숨을 쉬며 몸을 더 공벌레처럼 웅크렸다.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니까 약기운이 조금씩 도는 건지 고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약에 졸리게 하는 성분도 있었나. 많이 잔 것 같은데도 또 졸음이 쏟아졌다. 석민이 다시 잠에 들었다가 깼을 때는 저녁이 다 된 시각이었다.
사르륵 눈을 뜨자 반대쪽 침대에 민규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언제 돌아왔지? 민규가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듣고 푹 잤나보다. 석민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뭔가가 침대위로 툭 떨어진다. 찜질백이었다.
"일어났어?"
옆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민규가 끼고있던 이어폰 한 쪽을 빼며 물어왔다. 석민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고작 다섯 시 밖에 되지 않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민규의 귀가가 빨랐다. 석민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는사이 민규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이어폰을 마저 빼낸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오랜시간 침대에 누워있었던건지 민규의 머리카락도 이리저리 눌리고 부스스한 상태였다.
석민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 아까부터 묘하게 느껴지던 위화감이 뭔지를 깨닫는다. 조금 일찍 돌아온 수준이 아니었다. 민규는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계속 숙소에 있었던 것이었다.
"배는?"
"이제 괜찮아."
"밥 먹을 수 있겠어?"
"어어..."
민규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더니 비닐봉지 안에 든 포장용기를 꺼내었다. 아이구, 다 식었겠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용기에 손을 대어 남은 온기를 체크했다. 그리고는 식은 음식을 방 안에 있던 전자레인지로 가볍게 데웠다. 곧 향긋한 옥수수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밥 먹게 여기 앉아."
"...내 것까지 사온 거야?"
"응."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말투였다. 밥 먹어야 또 약 먹지. 테이블 위에는 작은 약봉지도 같이 놓여있었다. 몇 시간 전, 민규는 숙소를 나서자마자 핸드폰으로 지도를 켜 약국부터 찾았다. 소화제와 진통제를 구입하고, 잡화점에 들러 찜질백과 바늘도 샀다. 여차하면 손을 따줄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흰죽을 먹는게 제일 좋겠지만 유럽에서 흰죽을 구하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민규는 한참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폴렌타를 파는 작은 식당을 발견했다. 뭔가 죽이랑 좀 비슷하게 생겼는데. 검색을 해보니 옥수수 가루로 만든 음식이라 위장에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아 제 것까지 두 그릇을 포장했다.
숙소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석민이 자고 있었다. 깨지 않게 조심조심 찜질백을 데우고 배에 올려두었다. 뺨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수건에 물을 묻혀 살살 닦아내주고 식은 땀에 젖어버린 앞머리를 조심스레 쓸어 넘겨주자 그제야 말간 얼굴이 드러났다.
평온한 얼굴로 잠에 든 것을 보니 다행히 약을 먹고 좀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민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그제서야 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그리고는 석민이 깰 때까지 조용히 이어폰을 끼고 의미없이 유튜브 쇼츠를 넘겨보며 시간을 떼웠던 것이다. 안 그래도 밥을 먹여야하니 슬슬 깨울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때마침 석민이 타이밍 좋게 일어났다.
"살짝만 데웠어. 너 뜨거운 거 못 먹잖아."
"으응..."
석민은 눈치를 보며 테이블에 앉았다. 저 때문에 괜히 민규가 시간을 버린 것 같아 미안했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폴렌타는 고소하고 달달한 맛이 났다. 먹을만 해? 다정한 목소리에 괜히 마음이 간지럽다. 석민은 고개를 꾸닥이며 그릇에 거의 얼굴을 처박은 채 식사를 했다.
"미안."
"응?"
"나 때문에 괜히..."
말 끝을 흐렸지만 아마도 여행을 망치게 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민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 아, 하고 깨달음의 소리를 냈다. 그치만 아무리 생각해도 석민이 미안해 할 일은 아니었다. 신경쓰지 말고 놀다오라는 말을 무시하고 제 멋대로 숙소에 남은 건 자신이다. 그냥 그렇게 하는게 내 속이 더 편하니까.
예전부터 남의 눈치를 많이 보던 석민이다. 그는 입버릇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것 때문에 싸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좀 제발 그만하면 안 돼? 아무래도 그런 말을 들으면 민규도 덩달아 마음이 불편해지는 탓이다. 이럴 때는 그냥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면 되는데. 하지만 더 이상 지적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제 그럴 이유가 없는 사이니까.
"괜찮아."
민규는 짧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정적이 일었다. 방 안에는 조용히 수저를 뜨는 소리만 들려온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석민이 먼저 씻으러 들어갔다. 온 몸이 땀에 젖어 찝찝하던 참이었다. 그가 샤워를 끝 마치고 나왔을 때, 민규는 내일 입을 옷을 옷걸이에 걸어 정리하는 중이었다. 석민은 그런 민규의 뒷모습을 보다 슬쩍 물었다.
"넌 내일 어디로 가?"
"나는 토스카나에 가보려고."
"어?"
토스카나...? 석민이 대답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일정표 상으로는 내일은 석민이 토스카나에 가는 날이었다. 원래대로면 민규는 오늘 갔다왔어야 했으나, 가지 못했으니 그대로 일정이 하루가 밀린 것이다. 여행 동선이 겹치지 않게 하기로 약속했으므로 둘 중 한 사람은 포기해야 했다. 그렇다면 석민은 그게 당연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민규가 오늘 하루 여행을 망친 이유가 저 때문이었으니까.
"왜?"
"아냐. 잘 다녀 와."
민규가 의아함을 느껴 되물었으나, 석민은 급하게 대화를 끝냈다. 어딘가 말투에서 어색함이 뚝뚝 묻어져 나온다. 뭐지? 그냥 넘어가기엔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민규는 혹시나 싶어 다시 한 번 일정표를 살폈다. 제 일정표가 아닌, 석민의 일정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역시 석민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이유가 있었다. 석민의 일정표에 토스카나가 적힌 것을 보고 민규는 아차했다. 오늘 못 갔으니 단순하게 다음 날 가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석민과 일정이 겹칠 거라는 생각까진 미처 못한 것이다.
"아, 너 내일 토스카나 가는 날이었구나. 말을 하지."
"괜찮아. 나는 모레 가는 걸로 하면 되니까."
"아니야. 원래 일정대로 하는 게 맞지."
두 사람 사이에 의견이 갈리면서 예상치 못한 언쟁이 일었다. 양쪽 다 쉽사리 물러 설 생각이 없어보였다. 단순히 하루 늦게 가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토스카나 주에서 진행되고 있는 와인 축제가 하필이면 내일을 마지막으로 끝나는 것이다. 자연스레 둘 중 한 사람은 축제 관람은 못할 운명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두 사람은 고집을 부릴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자유 일정보다 기존 일정이 우선인게 맞잖아. 내가 바꾸겠다고."
"됐다니까. 애초에 네 일정이 미뤄진 데는 내 책임도 있고..."
석민의 말에 민규의 미간이 살풋 찡그려진다. 어쩐지 실랑이가 조금 길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민규 입장에서 이것은 양보가 아니었다. 원칙대로 하는 것이다. 제가 멋대로 바꾼 일정보다 기존에 짜놓은 석민의 일정이 우선인게 맞으니까. 그가 보기에 석민은 지금 하지 않아도 될 양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민규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늦잠 자서 못 간 거야. 너 때문이 아니라."
"어쨌든 내가 미안한 것도 있으니까,"
"제발 그 미안하다는 말 좀....!"
결국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잘못하지도 않은 걸로 눈치를 보고 과하게 배려를 하는 게 답답하여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간 것이었다.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 중간에 말을 멈추긴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급격하게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치. 우리는 이래서 헤어졌었지. 방금의 일로 잠시 잊고 있었던 이별의 사유를 다시금 상기해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비슷한 패턴의 싸움들이 반복됐었다. 어느 한 쪽이 잘못해서 일어나는 싸움은 아니다. 원인은 노력으로도 메꿀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성향의 차이었다.
"미안. 화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냐, 나도... 음, 화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민규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곧장 사과했다. 석민은 또 습관적으로 사과를 하려다 눈치를 보며 말을 바꾸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언성을 높였던 게 더더욱 후회가 된다. 결코 화를 내려던 것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흥분하여 목소리가 좀 커졌다.
일단 사과는 했으나, 여전히 분위기는 어색했다. 게다가 내일 어떻게 할 지 아직 결론도 내지 못한 상황이다. 두 사람 모두 싸움으로 번질까봐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 댔다. 그러던 중 무심코 고개를 돌린 민규의 시야에 어제 사 온 초콜릿이 들어왔다.
"...너한테 줄 거 있는데."
어? 나한테? 갑작스러운 선물에 조금 어안이 벙벙해졌다. 민규는 예쁘게 포장된 박스들 중 하나를 집어들어 석민에게 건넸다. 어제 샀는데 까먹고 못 줬네. 석민은 초콜릿 포장지를 보자마자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이거 나 완전 먹어보고 싶었던건데...! 석민은 놀람과 기쁨이 공존하는 투로 그렇게 외쳤다. 인터넷에서 이탈리아 가면 꼭 사와야 한다고 사람들이 추천하는 것을 우연히 봤다. 그렇게 맛있나. 호기심이 생겨서 블로그에서 알려준 대로 골목 구석에 있는 가게를 시간 내어 찾아갔지만, 하필 휴무 날이어서 허탕을 쳤다.
기대에 부풀었던 마음이 아쉬움으로 푸스스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다음 날 초콜릿을 사기 위해 굳이 거길 다시 들리기도 뭐해서 그냥 포기했었다. 그런데 이걸 민규가 사왔을 줄이야. 예상보다 격한 석민의 반응에 오히려 민규가 더 놀랐다.
"유명한 건지는 몰랐네."
"고마워... 아, 난 선물 준비 못했는데."
"이미 줬잖아."
"응?"
"마그네틱."
아, 그거... 석민은 좀 민망했는지 작게 웃었다. 그저 길거리에서 산 싸구려 마그네틱이었다. 딱히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준 것도 아니었던지라 이런식으로 보답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포장을 뜯은 초콜릿을 하나 집어서 맛을 봤다.
으음. 이거 맛있다. 눈이 번쩍 뜨일만큼의 단맛이다. 석민의 솔직한 리액션에 민규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치. 시식했는데 맛있길래 바로 샀어. 분위기가 좀 유해진 것이 느껴졌다. 석민은 초콜릿을 어디서 샀는지 물었다. 얘기를 하다보니까 자연스레 서로 여행 경험에 대해서도 공유를 하게 됐다. 같은 장소를 방문했는데도 여행 경험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고보니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처음이다. 그 동안은 서로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내심 궁금하긴 했어도 묻지 않았으니까. 우연히 냄새에 이끌려 들어간 디저트 가게에 석민도 똑같은 이유로 들렸다는 사실을 듣고 민규는 한참을 웃었다. 이런 점은 진짜 닮았네, 우리.
얼어붙었던 공기는 완전히 녹아내린지 오래였다. 신나서 한참을 대화하던 두 사람은 시간이 무척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겨우 이야기를 멈추었다. 이제는 정말로 내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정해야했다. 겨우 풀린 분위기가 다시 냉랭해지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둘 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확실한 건 석민도, 민규도 여전히 제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어보인다는 것이었다. 민규는 잠시 고민하는듯 하더니 석민에게 뜻밖의 말을 해왔다.
"내일... 그냥 같이 갈래?"
이렇게하면 누군가가 축제를 포기해야 할 일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민규의 머리로는 이게 제일 최선의 방법이었다. 동선을 겹치게 하지 말자는건 어차피 편의상 정해둔 규칙인데 합의해서 바꾸면 그만이다. 별 것도 아닌 걸로 계속 논쟁을 벌이느니 차라리 이게 훨씬 나았다.
"불편하면..."
"아니!"
석민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제는 정말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내일 또 늦잠자진 않겠지? 민규는 모닝콜을 새로 맞추며 농담을 했다. 만약에 나 안 일어나면 그냥 너 혼자 가. 그런 말도 덧붙이면서.
"....잘 자."
"응. 너도."
기분이 좀 묘해진다. 굿나잇 인사를 나누는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우니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이 쭉 머릿속으로 리플레이 됐다. 석민은 저를 걱정해주던 민규의 눈빛과 다정한 손길을 떠올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에 이불을 머리 끝까지 푹 뒤집어썼다. 함께 하는 여행이라...
어쩐지 좀 데이트같이 느껴져서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민규가 씻는 동안 석민은 입을 옷을 골랐다. 오늘따라 마음에 드는 옷이 없는 기분이었다. 캐리어를 한바탕 뒤집고 나서야 겨우겨우 청바지와 셔츠를 꺼내 꿰어입기 시작했다. 그러는사이 민규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며 나왔다. 바닥에 앉아 양말을 신고 있는 석민을 가만히 지켜보던 민규는 셔츠 깃이 엉망으로 접힌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손짓을 했다.
"잠깐 이리와 봐."
응? 석민이 영문도 모르고 민규의 앞에 쪼르르 다가가 서자, 그는 익숙하게 손을 뻗어 옷 매무새를 정돈해주었다. 깃을 제대로 다시 접어주고, 셔츠 안 쪽으로 손을 넣어 받쳐입은 반팔 티셔츠도 한 번 정리했다. 갑자기 불쑥 손이 안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석민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맨 살이 아니라 반팔 위로 손이 들어온 건데도 괜히 긴장하여 숨을 참는다. 차마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자신이 없어 그냥 눈을 내리깔았다.
긴장감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민규는 내친김에 석민의 머리카락까지 살짝씩 만져가며 스타일을 잡아주고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 됐다. 가볍게 어깨를 툭툭치는 손길에 석민이 정신을 차렸다. 고마워. 그는 잠시 예전의 추억을 떠올렸다.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냐며 장난스레 투덜대던 민규의 목소리를, 그러면서도 다정한 손길로 저를 챙겨주던 그를 기억한다.
어제부터 간질거리는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직 덜 말려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젖은 머리카락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아는 맛이 무섭다더니. 석민은 이상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날이 좀 흐리네."
"그러게. 비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두 사람은 나란히 보폭을 맞추어 기차역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딱히 맞춰 입은 건 아니었는데 하필 민규도 오늘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어서 어쩐지 더 커플처럼 보이는 모양새다. 토스카나까지는 기차로 1시간 40분 정도가 걸렸다. 자연스레 나란히 붙은 두 좌석을 예매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니까 금방 도착했다. 와인 엑스포의 여파 때문인지 토스카나는 관광객들로 무척이나 붐볐다. 자꾸만 사람에 치이는 석민을 보고 민규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도 되나? 석민은 잠시 고민했지만 안 잡으면 정말로 민규를 놓칠 것 같아서 일단 덥석 손을 붙잡았다.
우선은 마을을 먼저 구경하고 밥을 먹기로 했다. 축제 부스 외곽으로 빠져나오니 확실히 인파가 줄어들었다. 이제 손을 잡고 있을 명분 같은건 사라졌는데도 둘은 계속해서 맞잡은 손을 유지했다. 석민이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꼼질거리자, 민규가 아예 깍지를 껴 손을 고쳐 잡았다. 어쩌면 분위기에 좀 취했던 것도 같다.
거리에는 연인들이 많았다. 그 사이에 민규와 석민도 자연스레 섞였다. 서로 다른 맛의 젤라또를 사서 한입씩 나눠먹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고, 분위기 좋은 브런치 가게에서 밥을 먹었다. 누가 보더라도 연인의 모습이다.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듯 했다. 두 사람은 마음껏 행복을 만끽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좋은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민규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짐을 맡기고 사라졌다. 석민은 벽에 기대어 발장난을 치며 얌전히 그를 기다렸다. 그 때 낡은 모자를 뒤집어 쓴 어떤 할아버지가 석민에게 접근해왔다. 그가 뭐라고 자꾸만 말을 거는데, 주변이 시끄러워서 석민이 알아듣지 못하자 그는 그냥 손을 내밀어보라는 몸짓을 했다.
"석민아. 손 내밀지 마."
때마침 돌아온 민규가 급하게 다가오며 만류했지만, 이미 석민은 순진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향해 손을 내민 뒤였다. 그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석민의 팔목에 팔찌를 걸어 묶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자주 있는 팔찌 강매 사기 수법이었다. 민규의 예상대로 남자는 팔찌값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두 사람의 의견이 갈렸다. 민규는 돈을 줄 수 없다고 화를 냈고, 석민은 그런 민규의 눈치를 보다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아니, 돈을 왜 줘. 멋대로 팔찌 채워놓고 돈 달라고 하는건데. 하지만 석민은 그냥 실랑이를 하는게 싫으니 대충 돈을 쥐여주고 보내자고 했다. 이미 당한 걸 어떡해. 그냥 빨리 주고 보내자. 민규는 답답함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할아버지에게 돈을 주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됐다. 그 와중에 말도 안되는 가격을 부르는 것을 민규가 크게 화를 내서 절반 이상 깎았다. 만약에 민규가 없었다면 석민은 적지않은 돈을 그냥 남자에게 주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민규는 또 한 번 열이 받았다. 왜 이렇게 미련할 정도로 착하게 구는지. 그는 석민이 자꾸만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게 싫었다.
민규는 석민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해서 화를 냈고, 석민은 괜히 저 때문에 민규가 언쟁을 벌이고 감정이 상하는게 싫었으므로 일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다. 분명 서로를 사랑하고 위해서 한 행동인데 결과적으로 또 서로에게 상처만 남겼다.
팔찌 상인이 떠나간 후, 둘의 사이는 급격하게 냉랭해졌다. 대화가 거의 오가지 않았으며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졌다. 둘은 한 뼘 정도 거리를 벌린 채로 어색하게 걸었다.
그러던 중 민규가 아는 사람을 마주치게 된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어? 민규 형 맞죠."
우석은 혼자 배낭 여행을 온 대학생이었다. 며칠 전 우연히 민규와 만나 스몰톡을 주고받다 친해져서 내친김에 연락처 교환을 했었다. 딱히 이탈리아에서는 일정이 겹치는 날이 없길래 그냥 한국에서 한 번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는데 이런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민규도 아는 얼굴을 다시 마주치니 퍽 반가웠다.
"옆에는 일행이에요?"
"으응."
"뭐야. 형도 나처럼 혼자 온 줄 알았는데."
"전날까지는 따로 다녔어. 오늘만 같이 나온거야."
안녕하세요. 붙임성이 좋은 우석이 석민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반면 낯을 가리는 석민은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인사를 마친 우석은 민규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석민은 뻘쭘하게 멀뚱히 서서 그런 두 사람을 지켜만 봐야했다.
"축제 구경 했어요?"
"아직. 이제 가려던 참이었어."
"오! 그럼 같이 갈래요?"
"난 좋긴한데...."
둘의 시선이 동시에 석민에게 꽂혔다. 아, 혹시 제가 껴도 괜찮을까요? 반쯤 답이 정해져있는 질문이다. 그 상황에 차마 싫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음에도.
세 사람은 각각 축제 입장권을 사고 목걸이와 와인잔을 하나씩 받았다. 받은 잔으로는 여러 부스를 돌아다니며 와인을 따라 시음해 볼 수가 있었다.
우석은 평소 와인을 좋아하는지 그에 관한 상식 같은 것도 많이 알았고, 시음하고 나서는 맛 표현도 굉장히 신박하게 잘했다. 우석의 이야기를 듣는 민규의 얼굴이 무척이나 즐거워보였다. 겨우 하루 본 사이라면서 생각보다 더 친해보인다. 가깝게 붙어있는 두 사람을 보니 석민의 속이 홀로 끓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건, 명백한 질투였다.
"와인 남았어? 이리 줘. 버려줄게."
민규가 석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와인잔을 건네주자 대신 남은 와인을 버리고 잔을 돌려준다. 억지로 안 마셔도 돼. 석민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잘 마시는 둘의 템포에 맞추다보니 이미 예상보다 좀 많이 마신 상태였다. 머리가 팽팽 도는 기분이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요?"
"그럴까?"
어느새 우석은 자연스럽게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으로 정해져있었다. 아, 싫다.... 석민은 입술을 씹으며 생각했다. 너무 치졸한 감정이었다. 그치만 정말이지 민규와의 시간을 이런식으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또 남으로 돌아가야 한다.
현실적으로 재결합이 어렵다는 건 서로 인지하고 있었다. 좋은 감정이 남아있다고 다시 만날 것 같았으면 애초에 헤어지지도 않았을거다. 그만큼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이 상황에 자꾸만 좋았던 옛 기억을 끄집어내고 만남을 지속하며 관계의 발전에 대한 기대감을 만드는 것은 서로에게 독이 되기만 할 뿐이다.
그걸 다 알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니 또 이러고 있다. 그치만 아플 때 다정하게 구는 건 반칙이잖아. 거기서 안 설레고 안 반할 사람이 어딨어. 석민의 굳은 다짐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민규의 책임도 있다. 억울했다. 정작 민규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이랑 하하호호 웃고 있는데 저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이 상황이.
이 쯤에서 찢어지는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지금도 계속 속이 울렁거리는데 밥까지 같이 먹었다간 또 다시 체할 게 뻔했으므로. 석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난 그냥 혼자 먹을게."
"...."
"모르는 사람이랑 먹는 거 불편해서."
그는 민규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곧장 뒤를 돌아 걸었다. 기분이 이렇게까지 온탕과 냉탕을 오갈 수 있는건가. 분명 낮까지만 해도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끝없이 추락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이 와중에 팔에 눈치없이 걸려있는 팔찌를 보자 짜증이 확 치솟았다. 석민이 거칠게 팔찌를 잡아 뜯어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제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참을 수가 없다.
꼭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처럼 하늘이 우중충했다. 어쩐지 기분이 축 처지는 듯 했다. 석민은 감흥 없는 얼굴로 주변을 구경했다. 이상하게 혼자 있으니 뭘 해도 다 재미가 없었다. 고작 하루, 아니 반나절 같이 여행했을 뿐인데. 며칠을 혼자 여기저기 잘만 다녀놓고 갑자기 외로움을 느끼는 제 자신이 웃겼다.
그냥 일찍 숙소로 돌아갈까도 고민해봤지만, 어디선가 즐겁게 놀고 있을 민규를 떠올리니 괜히 심술이 나서 꾸역꾸역 일정표에 적힌 대로 남은 스케줄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슬슬 다리가 아파와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카페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자릿값으로 마실 줄도 모르는 에스프레소를 하나 시켜 테이블에 올려두고 그냥 한 동안 멍을 때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턱을 괴고 앉아있던 석민이 그대로 엎드려 눈을 감는다. 가만히 앉아있으니 우울함이 정도를 모르고 더 깊어져 갔다.
그래, 객기 그만 부리고 그냥 들어가서 쉬자.
석민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한 쪽 어깨에 가방을 대충 맸다.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에스프레소를 반납구에 가져다주고 나왔다. 생각보다 카페에서 시간을 오래 보냈는지 반납한 에스프레소는 완전히 식어있었고,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완전히 저녁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도를 보기 위해 핸드폰을 켰다. 배터리가 언제 이렇게 닳았는지 모르겠다. 절전모드로 전환하겠다는 경고 알림과 함께 핸드폰이 제 멋대로 액정의 밝기를 낮춰버린다. 민규가 커다란 보조배터리를 챙겼길래 짐을 간소화하기 위해 제 것은 빼뒀는데 그냥 갖고 올 걸 그랬다. 지도 앱에서 숙소 이름을 검색하고 추천 경로를 확인했다. 제발 핸드폰이 꺼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하길 바라는 바였다.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열심히 걷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석민의 뒤에서 어깨를 퍽 밀치며 지나가는 바람에 몸이 반 쯤 틀어졌다. 부딪힌 통증이 얼얼하게 남아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어깨를 감쌌다. 아아... 뭐야? 인상을 찌푸리며 뛰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본다. 남자의 손에 익숙한 가방이 들려있었다.
"어, 내 가방...!"
그제서야 뒤늦게 어깨에 허전함이 느껴졌다. 단순히 부딪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소매치기를 당한 것이다. 가방을 훔쳐 달아나는 남자를 따라 석민도 같이 뛰었다. 남자를 따라 코너를 돌자 드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분명 이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따라왔는데... 소매치기범은 금세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다.
석민은 가쁜 숨을 내쉬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다행히 여권은 숙소에 두고왔다지만, 지갑을 가방 안에 넣어놨던지라 지금 당장 쓸 현금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핸드폰 배터리도 없다. 액정을 두어번 두드려 켜자, 배터리는 아까보다 더 줄어들어 고작 5퍼센트 남짓 남아있었다. 언제 꺼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자존심이고 뭐고 지금 당장은 민규의 생각만 났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민규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또 한 번 통화는 부재중으로 넘어간다.
"왜 안 받아..."
그렇게 통화 시도를 하는 중에 결국 배터리가 방전되어 꺼지고 말았다. 석민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겨우겨우 정신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것부터 생각하자. 뭐든 방법이 있을거다. 가만히 있으면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도움을 요청할 곳을 찾기 위해 일단 어디로든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석민은 몇 발자국 옮기지 못하고 또 다시 멈춰 서야만 했다.
쩌억- 고무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맨발이 그대로 차가운 땅에 닿았다. 생경한 느낌에 석민이 고개를 숙여 바닥을 쳐다봤다. 신발이 찢어져버린 것이다. 여행 첫 날 싸게 샀다며 좋아했던 그 샌들이었다. 도저히 신을 수 없는 모양이 된 신발을 내려다보며 석민은 완전히 멘탈이 나갔다.
무언가를 잘해보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더 엉망이 된다. 그는 이제 완전히 의지가 꺾였다. 나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석민은 그냥 멍한 얼굴로 광장 한가운데 가만히 섰다. 뭘 선택하든 나는 언제나 최악의 선택만 하니까.
그리고 석민은 지금의 제 선택 또한 최악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냥 친구 아니죠."
"뭐가?"
"아까 그 친구분이요."
우석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민규를 쳐다봤다. 제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마지막쯤의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는 것 쯤은 알았다. 그러니까 석민의 표정이 꼭 버림받은 강아지 같다고 해야하나. 단순한 친구 사이에서 나올 법한 얼굴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전 애인이라든지."
"...."
"엑. 진짜로?"
아니, 어쩌다가 같이 여행을 오셨대요? 기함하는 말에도 민규는 대꾸없이 조용히 와인잔을 기울였다. 그러게 말이다. 어쩌다가 그랬을까. 심란함에 한숨이 푹푹 새어나왔다. 입맛이 없어 깨작댄 탓에 음식은 거의 우석이 먹어치웠다. 더 시켜줄까? 그렇게 묻는 말에 우석은 이제 배부르다며 그를 만류했다.
축제 부스 주변은 어느 음식점을 가도 사람이 너무 많아 버스를 타고 아예 다른 쪽으로 이동을 했던 두 사람이다. 동네가 조용하고 한적하니 좋았다. 눈에 보이는 작은 음식점을 즉흥적으로 찾아 들어왔다. 메뉴판에는 2가지 종류의 피자와, 몇 가지 와인만 간소하게 적혀있었다. 이 마저도 감성이 있다. 가게 안에 들려오는 재즈 노래도 분위기 있고, 인테리어도 예쁘고. 평소같았으면 신나서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러댔을텐데...
"어, 비온다."
"...그러게."
뚫린 창으로 빗줄기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날이 흐리더니 결국 비가 오네. 가만히 창 밖의 풍경을 멍때리며 구경하고 있으니 우석이 한 마디를 해왔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시면 그냥 가보시지 그래요."
"뭘?"
"계속 집중 못하고 계시잖아요. 신경 쓰여서 그런거 아니예요?"
그 말에 민규는 좀 뜨끔했다. 우석에게도 그게 다 느껴졌나보다. 아까부터 집중력이 계속 흐려진다. 특히 비가 오고 나서부터 그게 더 심해졌다. 우산 없을텐데. 지금쯤 숙소로 돌아갔으려나. 그런 걱정들이 자꾸만 쏟아진다.
"신경 쓰이긴 무슨."
"거짓말 진짜 못하시네."
"...."
"저도 신경이 쓰이던데 오죽 하겠어요."
"네가 왜?"
"...지금 질투하시는 거예요? 아니 누구라도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로 가버리면 신경 쓰이죠."
곧장 정색을 하는 민규에 우석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민규는 잠시 조용해지더니 슬그머니 물어왔다.
"니가 봐도 그렇게 보였어?"
"뭐가요."
"울 것 같은 얼굴..."
역시 민규도 그게 가장 신경이 쓰이긴 했다. 상처 받은 얼굴을 하고 뒤돌아가던 마지막 모습이.
"슬슬 일어날까."
"네. 좀 더 있으면 막차 끊길 거 같은데."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잠깐의 소나기였는지 비는 멎어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려 잠시 가방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냈다.
별 생각 없이 화면을 톡톡 두드려 킨 민규는 석민으로부터 온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놀라 눈이 커졌다.
다급하게 석민에게 콜백을 했다. -고객님의 전화가 꺼져있어....- 기계음을 듣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피가 식는다는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더 잴 것도 없었다. 민규는 곧바로 골목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았다.
일정표 상 맨 마지막 위치부터 차례로 돌기 시작했다. 미친 사람처럼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다 보니 어느샌가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중간중간 계속해서 석민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거는 족족 핸드폰이 꺼져있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속이 탄다. 험한 일이라도 당한 거면 어쩌지. 경찰에 먼저 신고를 했어야 했나. 수 만 가지 생각이 들 때 즈음, 광장 한가운데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전화는 왜 꺼져 있는지.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석민의 얼굴을 보자마자 전부 휘발된다. 고개를 푹 숙인 석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민규임을 확인한 그가 울컥하며 마침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머리카락과 옷이 다 젖은 채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석민을 민규가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민규는 안도하며 더욱 석민을 세게 안는다. 서러움이 북받쳐 아이처럼 엉엉 우는 그를 달래주듯 쓰다듬고 토닥였다. 가방도 없고, 핸드폰은 꺼져있고, 신발 한 쪽은 어디로 갔는지 맨발로 땅을 밟고 서 있는 석민의 모습이 대충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를 짐작케 했다. 절박하게 허리를 마주 안아오는 손길을 느꼈다.
달빛 아래 선 두 인영은 그렇게 한참을 떨어질 생각을 않은 채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숙소까지 돌아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고, 두 사람 다 현재 꼴이 말이 아니었다. 급한대로 근처에 허름한 방을 하나 잡았다. 젖은 옷을 대충 널어서 말려두고, 갈아입을 옷이 없어 맨몸에 샤워가운을 걸쳤다. 호텔에 더블베드 방이 다 나가서 침대도 하나 뿐이다. 씻고 잘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나란히 한 침대에 누웠다. 아까 부둥켜안고 울던 일이 뒤늦게 민망함으로 찾아왔다.
민규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반대쪽으로 몸을 돌아 누웠다. 눈을 감고는 있었으나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침 삼키는 소리가 상대방에게 들릴까 걱정이 될 정도로 방 안은 고요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귀가 쫑긋 섰다. 석민의 손이 민규의 허리께를 파고 들었다. 등 뒤로 긴장한듯한 숨결이 느껴진다.
"오늘만...."
"...."
"안 돼?"
기어이 참고 있던 욕구를 펑 터트리고야 만다. 민규가 몸을 돌려 석민의 뺨을 붙잡고 다급하게 입술을 겹쳤다. 울지 마... 민규가 속삭였다. 바보야. 너도 울고 있으면서... 석민이 엄지손가락으로 민규의 얼굴을 문질러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닦아낸 보람도 없이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입술을 부딪히고 몸을 겹치고 사랑을 나누는 내내 두 사람은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사실은 민규도, 석민도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서로가 서로를 아프게 할 지라도,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그냥 계속 붙들고 사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두 사람은 내일이 되면 오늘의 기억을 잊은 척 다시 관계를 리셋시킬 것이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민규는 그렇게 말하며 석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 밤은 짧고 너는 당연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이별을 향해 달려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