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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WORD : 청게, 로코

폭염주의보

현재 전국에 폭염경보 및 폭염주의보가 발효되었습니다. 연일 폭염특보가 발효 중이므로 햇볕이 뜨거운 낮에 옥외작업은 가급적 피하시고 노약자와 어린이는 야외활동을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밤에도 최저 기온이 25℃를 웃도는 열대야가...

어디서는 슬리퍼라도 신고 나가면 슬리퍼가 녹아서 쩍쩍 달라붙는다는 계절. 드높은 빌딩 숲의 복사열과 뜨겁게 달궈진 검은 아스팔트에 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공기가 몸을 감쌌다. 야외 운동장에서는 축구 한 번 하기도 힘든 날씨였다.

 

“민규야, 너 키스 해봤어?”

“해봤겠냐? 우리 남고잖아.”

“있잖아, 첫키스는 레몬 맛이래.”

“첫키스하면 종소리가 들린다던데?”

 

......해볼래? 맴맴맴, 매미소리가 천천히 잦아드는 그 순간에 소다맛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던 석민이가 더위라도 먹었는지 별안간 그런 말을 했다. 평소였다면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더위 먹었냐? 하며 넘겼을 텐데. 몸에 열 많은 걸로만 따지면 절대 석민에 뒤지지 않는 민규가 상대였던 게 문제였다. 나 하면 해. 마찬가지로 제대로 더위 먹은 민규가 더위 먹은 석민의 뒷목을 고정시켰다. 그러니까, 이건 다 더위 탓이었다.

 

첫키스는 레몬 맛이 난다더니. 레몬 맛은커녕 초코맛과 소다맛이 뒤섞인 이상한 맛이 났다. 댕, 댕, 하는 종소리 같은 것도 들리지 않았다. 애초에 시끄럽게 울리던 매미소리도 그 순간 만큼은 기가 막히게 안 들리는 것 같았으니까.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짧은 입맞춤이 끝났다. 더위 때문인지 뒷목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또 더위 때문인지 발갛게 물든 귓가가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들렸다. 올해도 많이 덥다더니 저리 시끄러운 소리를 용케도 못 들었다 싶었다. 석민의 뒷목을 받쳤던 머쓱한 손을 거두어 제 목을 문지르고 있으면 석민이 아무렇지 않은 듯 투덜댔다.

 

“에이, 레몬맛이 아니네. 김민규 니가 빠삐코 먹어서 그렇잖아. 메로나 먹지. 그럼 메론소다맛이라도 났을 텐데.”

“와, 이걸 내 탓을 한다고? 니가 먼저 하자며.”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뭘 또 그르냐. 오늘 진짜 덥다. 아이스크림 벌써 다 녹았어.”

 

석민이 말을 돌리며 거의 음료수가 된 소다맛 아이스크림을 털어먹었다.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입을 삐죽거리며 마찬가지로 거의 녹아버린 초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석미나 나 오늘 너네 집 가도 돼? 그러던가. 민규와 석민은 항상 이랬다. 맨날 싸우고, 그러면서도 맨날 붙어있고. 서로 어색해지는 상황을 견디질 못해서 괜히 별 것도 아닌 걸로 투닥거리기도 하고. 또 금세 화해하고. 서로의 집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고. 그게 고작 입맞춤 한 번 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었다. 볼 거 못 볼 거 다 봤는데, 뭘. 새삼스럽게.

 

-

 

......그게 새삼스럽게 달라질게 아니었는데. 민규는 이마를 짚었다. 밥 먹다가 더위까지 먹었나. 석민이 집에서 잘 먹고 잘 쉬고 잘 놀고 집에 잘 들어와서 잘 씻고 잘 준비까지 다한 와중에 갑자기 낮에 그게 생각이 났다. 내리쬐는 태양.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시끄러운 매미소리. 차가운 아이스크림. 차가워진 손이 목에 닿아 움찔대던 석민이와 달달한 맛이 났던, 아악! 진짜 미쳤나봐 김민규.

 

베개를 거의 쥐어 뜯듯이 붙잡고 온몸을 비틀어댔다. 아니이, 걔는 왜 그래가지고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어? 그래놓고 아무렇지도 않구. 민규는 베개를 꼭 끌어 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너무 더워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그렇기는 했다. 석민이 제정신이었으면 그런 뜬금없는 말도 안 했을 거고, 민규가 제정신이었으면 친구끼리 무슨, 이러면서 으이구, 하고 말았겠지.

 

몸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열대야라고 하더니, 달달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에서도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럴 수도 있지. 오늘 많이 더웠으니까. 더워서 아이스크림 먹다가 돌아버려서 친구랑 키스하고 그럴 수도 있... 있겠냐고. 세상에 어떤 친구가 덥다고 키스를 해. 그게 뭔 친구야. 베개 끌어 안고 아무리 합리화를 하려 해도 될 턱이 없었다. 그보다 민규를 더 심란하게 만드는 건 그게 또 나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좋았으면 좋았지.

 

그래, 그게 문제였다. 그냥, 좋았다. 지독하게 무덥고 숨 막히는 공기도, 시끄러운 매미소리도, 뒷목을 받쳤을 때 손에 뜨끈하게 느껴지던 온기도. 혀 끝에 느껴지던 소다맛과 초코맛이 뒤섞여 이상한 맛이 나던 아이스크림 맛도. 전부 별로였는데 그 상대가 석민이라는 거 하나로 다 좋았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얼렁뚱땅 입 맞추지도 않았겠지.

 

한참 베개를 붙잡고 동동거리던 민규가 으아아, 하며 침대에 털퍼덕 드러누웠다. 아, 어떡해. 나 석민이 좋아하나 봐. 탄식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때로는 그렇게 말로 내뱉고서야 스스로 확신하게 되는 생각이 있었다. 뭘 해도 석민이랑 하는 게 좋고 무슨 맛있는 걸 먹으면 석민이도 이거 좋아하는데. 이런 생각부터 들고 재밌고 신기한 거 있으면 꼭 석민이랑 같이 해보는 게 좋고 석민이 옆에 있으면 무서운 것도 덜 겁이 나는데 아직까지 몰랐던 게 되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렇네. 나 석민이 좋아하네. 민규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누가 봤으면 분명 가만히 좀 있으라고 했을 테다. 아무도 안 봐서 망정이지 어떡해? 어떡해? 하며 부산스럽게 굴던 민규가 다시 베개를 안았다. 진짜 어떡해. 나 석민이를 좋아해... 잘생긴 얼굴이 절로 시무룩해졌다. 걔는 그거 진짜 호기심으로 했던 거고 지금은 먼 이상한 잠꼬대하면서 배 긁고 자고 있을 텐데 진짜 어떡하면 좋냐고. 없는 꼬리가 축 처지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도 에어컨 켜놓고 배 까고 자는 건 아니겠지, 감기 걸리면 어떡해. 이 여름에 감기 걸리면 고생할 텐데. 이런 생각부터 드는 걸 보면 참 중증이다 싶었다.

 

아니 진짜 어떡하냐구. 내가 걔를 좋아하는 거랑 원래처럼 친한 친구인 거랑 어케 같이 가냐고. 걔가 나 싫어하면 어떡해. 아니지, 석민이가 나를 싫어하지는 않으니까 친구로만 지내자면서 어색해지면 어떡해애. 그건 싫단 말이야. 히이잉, 우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침대 위에서 길쭉한 팔다리를 휘적대고 있으려니 잠이 오지 않았다. 더위에 잠 못 이루는 밤이라더니. 그냥 심란해서 잠 못이루는 밤이었다.

 

-

 

학교 안 가? ......몰골이 왜 그래? 못 잤어? 그 말대로 민규는 간밤에 한숨도 못 잤다. 새벽 쯤에야 겨우 기절하듯 잠들었다. 이상형이 민규오빠 같은 사람이라고 하던 동생에게서 몰골이 왜 그렇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피로한 얼굴이었다. 안 되는데... 나 오늘 잘생겨야하는데... 석미니 데리러 가야해... 걔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겨. 아직 자고 있을 텐데. 잠꼬대로 웅얼웅얼 대답을 하고 있으면 유난스럽다는 얼굴의 동생이 얼른 씻기나 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민규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석민을 챙기는 게 당연하다는 듯 굴었다. 석민을 좋아한다는 걸 자각해서가 아니라 원래 그랬다. 어릴 때부터 손이 많이 가는 애였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냥 걜 좋아해서 그랬나 싶은 거지. 그게 또 새삼스러웠다. 세면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면 동생의 말대로 엉망인 얼굴이었다. 아 맞다 나 어제 울다 잠들었지. 근데 나 지금 석민이 보면 좀 눈물날 거 같은데 어떡해. 어떡하긴. 별 수 있나. 땀이라구 하지 뭐. 오늘도 어제만큼 더울거니까.

 

집을 나서면 이른 아침인데도 뜨끈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이 시간에 이 정도면 한낮에는 타죽는거 아니야? 에효효, 한숨을 폭 내쉬며 석민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초등학생 때부터 매일같이 드나드는 이 한 블록이 뭐라고 오늘따라 긴장이 됐다. 썩 유쾌하지는 않은 기분이기는 했다. 자신이 가진 감정이 이렇게 무겁다는 걸 몰랐을 때는 그저 신나는 길이었는데. 내가 석민이를 좋아해버려서 그런가 봐. 조금 시무룩한 기분으로 석민이네 초인종을 눌렀다. 저 민균데요...

 

이석민! 민규 왔대 빨리 학교 가야지! 아 알겠다고! 누나는 안 가? 나는 공강이야. 아 부러워! 아침부터 시끌시끌한 석민이네에서 석민이 우아악! 하며 튀어나왔다. 평소랑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심란해 죽겠는데 너는 평소랑 다를 게 없는 걸 내가 안심해야 해 아니면 서운해야 해. 민규가 여러 생각을 하는 와중에 집에서 뛰쳐나오던 석민이 민규와 눈이 마주쳤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너 울었어?!”

“......아니? 내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석민의 눈가가 붉었다. 민규는 그 얼굴을 모르지 않았다. 수련회 캠프파이어 촛불행사에서 혼자 눈물 터져서 새벽 내내 훌쩍거리다 아침에 붕어눈 되는 걸 햇수로만 10년 쯤 봤는데 밤새 운 것 같은 그 얼굴을 모를 리가. 석민은 여리고, 눈물이 많았고, 민규는 항상 그런 석민을 달래주곤 했으니까.

 

어디 봐봐, 눈가 짓무른 거 아니야? 민규가 심란했던 건 석민이 울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하나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됐다. 석민의 얼굴을 냅다 붙잡고 석민을 살피고 있으면, 석민이 움찔거리며 눈을 슬쩍 피했다. 아니이... 그냥 더워서, 잠을 못 자서 그래. 우물쭈물 눈을 굴리던 석민이 황급히 민규와 떨어졌다.

 

“......덥다, 빨리 가자.”

“어어, 응......”

 

며칠 째 폭염에 야외활동을 주의하라는 재난문자는 오늘도 왔다. 그 말처럼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뜨겁고 습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머쓱하고 간지러운 기분이 드는 것도 아마 그 탓이리라. 그런데도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맴맴맴, 목청껏 울리는 매미소리가 시끄러웠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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