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VES

KEY WORD : 외계인
우주
이석민은 지구인이 아니다. 정확히는, 지구의 정의에 따르자면 외계인이다.
이석민은 스스로를 우주여행자라고 불렀다. 이 행성, 저 행성을 떠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는 여행자라고. 지구에 온 것은 불시착이었다. 우주선의 이상으로 급하게 아무 행성에 착륙했고, 마침 그게 지구였다. 가진 것이라곤 우주선밖에 없는 우주여행자는 돌아가겠단 생각 하나로 우주선을 수리하려고.. 했으나 그게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러는 동안 지낼 곳이 필요했다. 마침 불시착했던 곳도 사람이 많지 않은 작은 동네였고 마을 어르신들에게 적당한 말동무나 하며 지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일부러 눈에 띄지 않으려 나름 사람의 옷을 입고 사람처럼 행동했으나, 안타깝게도 그 남자는 눈치가 너무 빨랐다.
마을 축제 때문에 왔던 그는 이석민이 보기에도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큰 키에 다부진 몸까지. 그러니까 이석민은 그에게 관심이 생겼다. 초대가수는 아니고 매니저로 왔건만 이석민은 무대에는 관심도 없고 그 매니저에게만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남자는 석민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뭐야, 저 사람.
이상한 사람이야. 괜한 기분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 시선이 느껴졌다. 그 남자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도로 자리에 앉았다. 행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중간중간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때마다 근육이 당겨오는 게 이런 기분이 꽤나 오랜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저 눈으로 끝나고 보자는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끝나고 뭐해요?
왜요?
음, 을호씨는 따로 약속이 있대서 먼저 갈 거고. 나는 내일 휴일이라 여기서 하루 더 있다가 가도 되거든요.
이후로 김민규는 종종 이석민을 보러 작은 동네에 찾아왔다. 대체로 이석민은 정자에 앉아 앞집 할머니가 부탁한 마늘을 까고 있거나, 마을이장님이 부탁한 밭일을 도와주고 있다거나. 별 일 없는 날이면 마루에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뭐가 보여요? 하며 옆에 슬쩍 누우면 이석민은 덥다며 옆으로 도망갔지만 이내 김민규의 팔에 잡혀 품 안에 안겨 있곤 했다.
김민규의 품은 꽤나 안정적이었다. 운동을 좋아한다고 하더니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꽤나 든든하게 이석민을 받쳐주었다. 그 단단한 팔에 안겨있을 때만 들리는 심장 소리도 이석민에게 안정감을 주곤 했다. 그러니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종종 잊을 정도로.
김민규가 오지 않는 날이면 이석민은 아직도 멀쩡해질 기미가 없는 우주선과 씨름을 했다. 통신장치마저 고장이 나서 연락을 할 방법도 없고,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 좀 더 할걸. 쓸모없는 후회를 하며 결국 도구를 홱 바닥에 던져버리곤 마루에 드러누웠다. 가야하는데, 형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괜시리 고장 난 통신장치의 버튼을 꾹꾹 눌러보지만 역시나 반응은 없다. 힘없이 툭 하고 내려놓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익숙한 얼굴이 쑤욱 들어온다.
석민아!
너 내가 반말하지 말랬지.
김민규가 나이를 물었을 때 귀찮음에 대충 그의 나이보다 2살 정도 많게 알려줬더니 그 이후로 형. 형 뭐해요? 하고 앵겨 붙는 모양새가 마치 반려동물마냥 귀여웠다. 나중에 따져보니 지구나이로 환산해도 김민규보다 나이가 많은 게 맞긴 하더라. 그리고 조금 친해졌다 싶었더니 제 멋대로 말을 놓으며 기어오르기도 했다. 가끔 석민이 야. 하고 정색할때 정도만 끼잉 하며 강아지처럼 추욱 늘어지더니 다시 석민이 손을 내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마치 귀랑 꼬리라도 달린 듯 활짝 웃곤 형 저녁 먹으러 가요. 하며 활짝 웃어 보이곤 했다.
오늘 온다고 안 했잖아.
형 보고 싶어서 왔어.
씨익 웃어 보이는 얼굴이 역시나 미남이다. 이 정도면 너 그 매니저인가 그만둔 거 아냐? 아냐 아냐. 오늘 쉬는 날이야. 끙차. 이석민이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자, 김민규가 옆에 바짝 붙어 앉아온다. 손깍지를 끼며 저녁 뭐 먹을까아- 하면 눈이 반짝거린다. 실없는 대화를 이어 나가던 중 김민규의 눈에 통신장치가 들어온다. 이건 뭐냐며 집어 들었을 때 석민이 화들짝 놀라며 민규의 손에서 통신장치를 뺏었다. 이거, 그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바지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었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저를 바라보는 김민규의 시선은 간신히 외면하면서 말이다.
저녁을 먹는 내내 김민규의 얼굴엔 '지금 뭐 숨기는 거 있지.'라는 말이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애써 화제를 돌리며 몇 번 다른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김민규가 관심을 조금 덜어낸 것 같은 표정을 보였다.
그래서 아무튼 나 오늘 하루 자고 갈 거야.
뭐, 매번 그랬으면서.
아무튼 그럴거구우.
알겠어, 알겠어.
이석민은 거짓말을 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김민규는 이석민의 이상함을 꽤 일찍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다급하게 무언가를 숨긴다거나 괜히 눈을 데굴데굴 굴린다거나, 혹은 눈에 띌 정도로 화제를 돌린다거나. 처음엔 바람이라도 피우나 했다. 근데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단 말이지.
그래서 김민규는 이석민이 잠이 든 틈을 타 아까 그렇게 다급하게 숨기던 무언가를 찾았다. 그렇게 급하게 숨겼던 것 치곤 서랍 맨 위에 넣어놨더라. 손바닥만 한 물건은 버튼을 꾹꾹 눌러봐도 반응이 없었다. 이게 뭐라고 숨겼대. 하고선 일어난 김에 집 여기저기를 살폈다. 형이 알면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좀 이상하잖아. 그리고 냉장고 위에 손을 넣었을 때 무슨 공책 하나가 손에 잡혔다. 이석민의 일기로 보였다. 이건 진짜 보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조금만. 하며 첫 페이지를 넘겼다.
[우주선 수리 일지]
어?
예상치 못한 제목에 김민규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설계도와 온갖 숫자들. 날짜별로 정리된 데이터로 보이는 내용. 이건 일기가 아니다. 무언가, 그러니까 말 그대로 '우주선'을 수리했던 일지이다. 알아볼 수 없는 내용들이 한가득인 공책 몇 페이지를 더 넘기니 중간중간 석민이 쓴 것으로 보이는 일기가 있었다.
[.... 형이 걱정할 텐데.. 집에 가고 싶어! 통신장치라도 얼른 고쳐야 얘기를 할 수 있다. ....]
[.... 요즘 자꾸 하늘을 보는데 혹시나 누가 날 찾아올까 봐. 근데 오늘도 아무도 안 왔다. ....]
집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중간중간 김민규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만 이미 그런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석민의 '집'은 지구가 아니고, '집'에 돌아가려고 우주선을 고치고 있었다. 찾아갈 때마다 마루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을 정도로 유별나게 하늘 보는 걸 좋아했고, 별것도 아닌 이야기에 신기해 하던 모습은 전부 이석민이 외계인이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불쑥 찾아갔을 때 화들짝 놀라던 모습들은 아마도 숨겨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 저에 대한 마음 정도는 진심이었던 것으로 보였다만, 혹여나 이석민이 여길 떠난다면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면 우주선을 다 고치면 이석민은 지구를 떠나는 거야? 배신감이 몸을 휘감았다. 사랑한다고 했잖아.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김민규는 통신장치라고 부르던 그 물건을 저의 가방 안쪽 깊숙한 곳에 넣었다. 안 갔으면 좋겠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이석민의 얼굴이 보인다. 조심조심 옆에 몸을 뉘었다. 석민아 네가 여기 계속 있어 줬으면 좋겠어. 잠든 이석민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품에 그를 당겼다. 옅게 잠투정하는 소리를 내면 등을 토닥여주며 다시 편히 잠들 수 있게 꼬옥 안아준다. 그러니까 형. 여기 있어요.
그때부터 김민규는 이석민 몰래 우주선 부품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어렵지는 않았다. 이석민이 다른 일을 하는 동안 김민규는 몰래 집 뒷문으로 향했다. 이석민이 고치고 있다는 우주선도 집 뒷문만 열면 바로 보였고 거기서 정체 모를 부품 한 두 개 씩 빼돌리는 건 더더욱 쉬웠다. 아마도 이석민은 우주선을 고치지 못할 것이다.
이석민이 돌아오면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팔을 활짝 벌리면 이석민은 자연스럽게 김민규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팔로 어깨를 감으면 이석민은 김민규의 허리를 안았다.
좀 이따가 산책하러 나갈까?
응.
강아지처럼 가슴에 고개를 묻는 모습에 김민규가 이석민의 뒷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김민규는 이 평화로운 시간이 좋았다. 별것 안 하고 그냥 이석민과 같이 있는 그 시간이 오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석민은 우주선 수리를 하면 할수록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 그리 손이 야무지지 못한 편이라 원래도 물건을 자주 잃어버려 본인의 실수이겠거니 했는데 그 횟수가 잦아진 것 같다. 분명 어제까지 봤던 기어 부품이 오늘은 없다. 한 손에 드라이버를 들고 구석구석 찾아봤지만 역시나 없다. 아마, 이건 잃어버린 게 아닐 것이다. 누군가 가져간 것이다.
그리고 이석민의 의심은 김민규로 향했다. 자유롭게 여길 드나들며, 그리고 저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깨닫더라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을 사람. 그건 김민규밖에 없었다.
김민규로 결론을 내리고서 이석민은 혼란스러웠다. 김민규와 시간을 보내며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종종 잊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돌아가야 한다, 였는데 김민규의 옆에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불쑥 튀어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하늘엔 별 하나 없이 까맣기만 했다. 그러니까 저를 구하러 오는 우주선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옆을 봤을 때 김민규의 부재는 극심한 허전함이 몰려오게 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그러니까 이석민은 김민규가 필요했다.
형!
이석민의 허전함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부른 적도 없는데 한 손에 치킨을 들고 문을 열고 김민규가 찾아왔다. 형 보고 싶어서 일 끝나자마자 왔어. 하곤 마루에 앉아 사 온 치킨을 펼친다. 맑게 웃으며 오늘은 어땠고, 그래서 저쨌고 입안 가득 채운 채로 말하는 모습에 이석민의 마음이 김민규로 채워졌다.
이석민이 김민규에게 손을 내밀면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끼어온다. 깍지 낀 손을 잡아 당기면 김민규가 이석민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짧게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이석민이 김민규의 어깨를 잡아 당겼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깊게 입을 맞춘다.
오늘은 하늘 안 봐?
응. 너 있잖아.
나란히 누워 잠들 즈음 김민규가 뒷문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문을 안 닫아놨구나. 김민규의 불안정한 시선을 저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김민규와 눈을 마주쳤다. 눈을 마주치자 불안했던 눈빛을 애써 지우고 밝게 웃어주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돌아가고 싶은 걸까, 아니면 네 곁에 있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