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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WORD : 짝사랑

여름종말론

사방의 산이 요새가 되어 왜군마저 소득 없이 그저 지나쳐갔다는 그 마을은 들어오는 이도, 나가는 이도 없어 사시사철 쓸쓸한 기운을 풍기곤 했다. 도로도 마땅치 않은 산을 굳이 넘는 이도 없거니와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 차로 한 시간 거리니, 실수로 지나치기도 어려운 곳이다.

장마철이면 꼼짝없이 마을에 갇혀버린다. 배수가 안되면 다 같이 죽는 거였다. 산사태라도 날까 두려워 예부터 마을 장정들이 매주 모여 기도를 올렸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내일이 오게 해달라고.

산 중턱에 가려진 해는 열 시나 되어서야 찔끔 얼굴을 내비치고, 다섯 시 땡 치면 도로 홀라당 들어가 버리니 바깥 생활도 쉽지 않다. 이토록 환경이 열악하니 사람들이 한데 뭉치기 쉬웠다. 중앙의 작은 봉우리를 기준으로 다섯 개의 마을이 모여있어 수도 적지 않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매일같이 얼굴을 보며 한 집 살이를 한다. 옆집 초등학생 딸내미가 수학 점수를 27점 받았다던가, 분식점 김씨네 강아지가 공용 텃밭의 알배추를 다 뜯어먹었다는 등의 일들은 십분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았다.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소문과 소문과, 소문이 쌓여 만들어진 마을이다.

 

뒷산 너머 노란 지붕 최 씨네 집 막내아들이 이번에 산을 지나다가 큰일을 당했다지 뭐야. 예끼, 차라리 죽었으면 다행이게. 눈도 못뜨고 두 다리가 박살 나 병신이 되었으니 이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 그 뭐라더라, 식물인간? 그렇게 됐다더라고. 이게 다, 그 집이 산신을 안 믿어서 그런 거지 뭐.

 

거짓말도 천 번을 반복하면 진실이 되기 마련이다. 소문이라는 게 그랬다. 자꾸만 소문과 소문과 소문이 쌓이다 보니, 어느 날엔 그게 진실이 됐다. 이유는 필요 없다. 근거는 의미가 없었다. 그저 모두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그 신이 우리를 지키고 있다고.

 

/

 

퍼스트 펭귄은 어떻게 물에 몸을 던졌을까. 얼어 죽을 수도 있는데, 사실 물속에 먹이따윈 없을 수도 있는데. 에베레스트에 최초로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나 달에 처음 착륙한 닐 암스트롱 같은 탐험가들은 날 때부터 모험을 즐겼을까. 널찍한 민규의 등짝을 가만 훑어보다 문득 든 생각이다. 너는 어떻게 저 산을 넘었을까. 얘는 에드먼드 힐러리도, 닐 암스트롱도 아닌 그냥 내 친구 김민규일 뿐인데.

 

김민규의 탈출기를 영화로 만들면 천만 관객은 따 놓은 당상이다. 반항심에 저 산턱을 넘는 사람이 여태 한 명도 없었겠냐마는.. 여섯 번을 넘은 건 눈앞의 얘 뿐이다. 첫 번째 가출은 열 네 살, 인생 첫 중간고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석민은 제게 내밀어진 민규의 손을 보며 발만 동동 굴렀었다. 같이 갈래? 나 이 좆같은 사이비 동네에서 못 살겠어. 민규의 옆집 사는 꼬맹이가 친구들에게 두드려 맞고 온 날이었다. 그 신이 진짜 있기는 하냐고, 누구 하나 본 적은 있냐며 중얼거렸더니 우르르 달려와 다구리를 깠단다. 그 옆에서 담임선생님이 올타구나 박수를 쳤단 말을 하면서 민규는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도록 주먹을 쥐었다. 도망가자 석민아.

 

두 번째는 그 해 겨울. 첫 가출 시도로 마을 어른들의 눈 밖에 난 김민규가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택배 화물차에 올라탄 사건이다. 평소 택배 기사님한테도 살갑게 애교를 부리던 놈이라 약아빠졌다며 혀를 끌끌 거리는 이장님의 잔소리만 늘었다. 세 번째는 언제더라. 오밤중에 산에 오르다 길을 잃었던 날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 민규는 늦은 새벽, 귓가가 누런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마을로 내려왔다. 얘를 구하기 위해서 산을 탄 것뿐이라고, 마을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고 둘러댔지만 거짓말이라는 걸 석민은 안다. 민규의 열린 책가방 틈새로 양말과 속옷가지가 튀어나와 있었으니까. 혹시나 민규가 또 혼날까 싶어 가방문을 몰래 닫아줬었다.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기어코 탈출에 성공한 여섯 번째도 하나같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시도였다. 그중 한번은 산을 타다 발을 헛디뎌 피가 철철 났는데, 쓰러진 친구를 업고 기껏 다 오른 산을 도로 내려오기까지 했단다. 두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죄송해요. 제가 꼬셨어요, 도망가자고. 석민이는 아무 죄 없어요. 제발 석민이 좀 살려주세요.

 

꺼져가는 의식 너머로 들려오던 민규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선명하다. 

그래서 나는 너를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너 혼자 가면 되잖아.." 

"야 밤길은 무서운 거 알잖아."

"그렇게 겁 많은 애가 산은 어떻게 탔대?" 

"그거랑 다르지.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이 나올 때도 있는 거고... 지금은 아니란 말야."

 

상식 아재가 막걸리 사 오래. 그 말에 못 들은 척 귀를 파니 민규가 성큼 다가와 어깨를 툭툭 쳤다. 석민의 집은 마을의 외곽 중에서도 특히 외곽에 위치해 있다. 마트가 있는 중심지에 가려면 작은 뒷산도 하나 넘어야 하고, 걸어서는 사십분이요 자전거로도 이십오 분은 족히 걸리는 대장정을 펼쳐야 한다.

그 아저씨는 술 좀 끊으라 그래. 툴툴거리면서도 민규를 따라나섰다. 네가 가자면 가야지 뭐.

 

민규의 친가 쪽 사돈의 팔 촌 즈음 되는 상식은 마을 어른들에게 미운 털이 제대로 박혀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하고 갇혀있던 민규를 꺼내 살려준 사람이다. 산을 타다 긁힌 자잘한 상처들을 치료해 주고, 민규에게는 아무것도 팔지 않겠다는 마트 사장님 멱살을 잡아 짤짤 흔든 일도 있었다. 마을 애들에게 도둑맞은 체육복이나 준비물을 되찾아준 것도 전부 상식이었다. 기어코 마을을 떠난 민규가 여전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도 그의 역할이 컸다. 너한테 은인이면 나한테도 은인이지. 근데 술은 좀 끊으시라 그래.

  

"좀 춥다.."

"그래? 잠만."

 

낮에는 해가 짱짱해 반팔만 대충 걸치고 집을 나섰는데, 어제 비가 내려서인지 밤공기가 차갑다. 석민이 두 팔을 감싸며 작게 떨자 민규가 망설임 없이 걸쳤던 체크 남방을 벗어 건넸다. 맞닿은 손에서 찬 기운이 전해져온다.

 

"됐어, 너도 손 차가운데..."

"나는 원래 수족냉증이라 손이 차."

"...언제부터. 야 됐다니까,"

 

민규가 거절하는 석민의 손을 잡아 내리고 어깨 위로 남방을 걸쳤다. 기분 좋은 섬유유연제향이 난다. 몰래 웃은 석민이 간질거리는 제 볼을 긁적였다. 무식하게 다정한 놈. 괜스레 심술이 난다. 

 

민규의 앞선 시도 중 두어 번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작은 숙소를 잡아 삼일 정도 외박도 해보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러 다닌 적도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는 역시 그거였다. 돈. 경제적 독립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이라지 않은가. 열일곱의 코흘리개가 마을을 벗어나 봤자 굶어 죽기나 하지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알바 하나를 하려 해도 부모님 동의서를 구해오라는데...

그렇게 다섯 번의 실패를 경험한 김민규는 기어코 미친 짓을 했다. 집안의 모든 돈 될만한 귀중품을 쓸어 간 것이다. 지 돌 반지는 물론이고 부모님의 결혼 예물이나 노트북, 포장도 뜯지 않은 신발 따위를 상자 째로 들고 튀었단다. 석민도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아들의 거듭된 탈출 시도로 반쯤 체념한 민규의 부모님이 마을회관에 주저앉아 엉엉 울던 걸 두 눈으로 봤다. 내 다이아 박힌 결혼반지~ 하면서 통곡을 하셨었다. 장장 이 주 동안 모든 연락을 씹던 민규는 적당한 타이밍을 골라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협상합시다. 내가 이거 다 줄 테니까, 나 여기서 살게 해줘요. 아니면 다 갖다 팔고.

 

포장도 뜯지 않은 나이키 조던은 민규의 아버지가 세 배 값을 주고 해외에서 들여온 한정판이었다. 오케이 콜. 너 맘대로 해라! 그렇게 김민규는 기어코 탈출했다. 나를 두고.

  

"..언제 가?"

"나? 음.. 이번엔 좀 더 있을까 봐. 개학 직전에 가려고."

"겨울엔... 안 올 거지?"

"못 오지. 차 미끄러지면 개죽음이야."

 

용돈 보내달라고 구걸하는 중에 양심은 찔렸는지 민규가 슬쩍 흘렸던 말이다. '여름방학엔 갈게요.' 올해로 세 번째다. 장마비에 젖은 풀 내음이 짙어질 즈음 민규는 마을로 돌아왔다. 석민은 하염없이 그 날만을 기다렸다. 숨 막히는 더위에 땀이나 줄줄 흐르는 여름이 뭐가 좋다고, 그 여름이 오기만을 지겹게 기다렸다.

 

"너가 와. 겨울에 뭐 없지 않아? 최상식 씨 12월 말에 온다는데 같이 와라 석민아."

 

니 그 좁아터진 자취방에 아저씨 하나랑 고딩 둘이 어떻게 눕냐고, 가볍게 대꾸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민규가 태어나던 해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마을의 권력을 꽉 쥐고 있던 무당이 예언을 뱉은 것이다.

민규 얘는 산신을 아주 화나게 할 놈이야. 여간 드센 사주가 아니라고. 꼭 맞는 짝을 일찍부터 붙여놔야 쓰겠어. 입이 트이기 시작하면 바로 붙여놔야 해, 안 그러면 늦어.

그 무당이 민규의 고모 할머니다. 당연하게도 의심 없이 철썩 믿은 민규의 부모님은 좋다구나 상대를 점찍어달라 졸랐다. 저짝 산 중턱 노란 지붕 댁 있지? 거기 곧 누가 올 거야. 그 집 아가 좋겠다.

 

그게 나다. 김민규의 꼭 맞는 짝, 이석민.

 

그 후로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옹알이도 함께, 인생 첫 감기도 함께, 찌질한 순간도 눈물 나는 순간도 당연하다는 듯 함께였다. 너네 둘이 커서 결혼할래? 하고 물으면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붙어서 놀다가 집에 갈 즈음 되면 부모님의 발목을 붙잡고 엉엉 울기도 했다. 석민이 두고 못 간다고, 차라리 나를 버리고 가라고 소리쳤던 귀여운 김민규는 더 이상 없지만. 얘가 나고 내가 곧 얘다. 우린 그렇게 컸다. 한 침대에 이불 덮고 자는 것쯤? 어렵긴 커녕 익숙하기까지 한 일이다. 그런데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건 왜인지.

 

어느덧 훌쩍 큰 민규를 올려다봤다. 나보다 작았던 날도 있었던 것 같은데. 위로 아래로 자꾸만 커지는 민규가 섬유유연제향을 풍기며 가까이 붙어온다. 싫어? 겨울에 나와서 나랑 놀자. 응?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고."

"...갑자기?"

"우리 학교 앤데... 내가, 아.. 아니다."

 

찝찝하게 왜 말을 하다 말아. 석민이 복잡한 머릿속을 달래며 침착하게 반응하려 애썼다. 안절부절못하는 게 꼭 나 같다. 누가 '너 김민규 좋아하냐?' 하고 물으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얼타던 나. 왜 뭔데? 말해봐. 나름대로 차분하게 대답했다마는... 잘 모르겠다. 목소리가 떨렸을지도.

 

"그... 내가 좋아하는 앤데."

"... 아, 그래?"

"아직 고백한 건 아닌데, 겨울에 너 올 때 즈음이면 또 모르지. 와 나 이거 처음 말해. 진짜 개 떨리네, 큰일 났다."

 

김민규는 매사에 진심이다. 작은 똥강아지를 구하는 일에도, 불의에 맞서는 일에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에도 항상. 말릴 생각도 못 하게. 나 두고는 못 간다며 김민규. 왜 나만 여기 버려두고 가서 자유를 만끽하는지. 왜 새사람을 옆구리에 끼고 나를 기만하는지. 민규가 남기고 갔던 수많은 여지에 대해 생각했다. 자꾸 나한테 웃어주고,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챙겨주고, 춥다 하면 옷 벗어줘 덥다 하면 부채질해줘.

나열해 보니 이보다 다정하기도 어렵겠다 싶었다. 그 어려운 걸 김민규는 누구에게나 한다. 찌질하다 이석민. 애써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아, 그래? 잘 됐네. 축하해. 로봇 같은 대답이 줄줄이 쏟아진다. 헤실헤실 웃던 민규가 짝사랑 상대에 대한 자랑을 늘여놨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밤에도 안하던 양 세기를 하며 걸었다. 키가 어떻고 눈이 어떻고, 실컷 지껄였는데 귀에 들어온 내용은 하나도 없다. 걸음에 속도가 붙어 평소 사십분씩 걸리는 거리를 이십오 분 만에 도착했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막걸리 두 병을 집어 든 민규가 냉동 코너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너 뭐해? 

 

"이거 걔가 좋아하는 건데.."

"...야 김민규,"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그럼 걔한테 마트 같이 가자고 하지 왜? 네 그 잘난 짝사랑 상대도 여기 데려와 보지 그래. 놀라서 기겁하고 도망치겠다. 너도 사실 알고 있지 않아? 좆 같은 사이비 동네라 하지만 온 동네 사람들이 너 하나 키우겠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결국 너도 여기 사람이라는거, 알고 있지 않아?

구질구질한 말들은 속으로만 삭혔다. 민규가 들여다보는 고급 아이스크림 옆의 것에만 시선이 갔다. 우산 모양 아이스크림. 포도 맛과 오렌지 맛이 있는데 석민이 유독 포도 맛을 좋아해 늘 당연하다는 듯 오렌지 맛을 꺼내 먹던 김민규가 머릿속을 스친다. 이름 모를 그 사람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마저 고급지다. 사람 비참해지게. 저 아이스크림은 바닐라 맛 하나뿐이라 민규가 누굴 배려해 억지로 오렌지 맛을 꺼내먹는 일 따윈 없을 거다. 마을 사람들이 떠미는 대로 휩쓸리느라 휘청거리는 나를 지키려 애쓰는 일도 없을 거고. 

 

곱씹을수록 상실감만 커졌다. 나는 정말로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구나. 너를 좋아할 자격도 없다. 질투할 자격도, 원망할 자격도 없다.

시선을 돌린 민규가 아이스크림 상자 하나를 꺼내 든다. 지겹게 나눠 먹으며 자랐던 우산 모양 아이스크림을.

 

"그건 왜."

"너 이거 좋아하잖아. 이따 카트 하면서 먹자."

 

대개 이런 식이다. 이런 바보 멍청이 말미잘 해삼 김민규! 나도 이제 너 안 좋아해! 하고 난리를 치다가도 훅 들어오는 다정한 김민규한테 기어코 져버리고 만다. 이젠 진짜 그만 좋아하고 싶은데 도무지 기회가 없다. 얘한텐 아무 의미없는 호의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 그래서, 진짜 올 거지 겨울에? 나 너네 부모님한테 말씀 드려놓는다? 아, 봉투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대답은 듣지도 않고 휘적휘적 걸어나가는 민규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아 진짜 짜증 나 김민규. 종종걸음으로 쫓아가자 녹기 전에 먹어야 한다며 아이스크림 상자를 뜯은 민규가 포도맛 두 개를 골라 석민의 손에 쥐여준다. 비닐 포장지까지 야무지게 까서.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 김민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민규는 조잘조잘 산 너머의 일상을 늘어놨다. 민규가 일하는 패스트푸드점에 하루 걸러 한번 꼴로 오는 진상들이나, 학급 수가 열댓 개나 되는 학교에서는 체육대회를 어떻게 하는지 따위의 말들이었으나 정신이 없어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그 패스트푸드점에 네가 좋아하는 애도 자주 와? 체육대회 때 같이 찍은 셀카들이 네 핸드폰 갤러리에 담겨 있을까. 투박한 질투가 스멀스멀.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는데 돌아오는 길은 늘 순식간이다. 따라 들어오려는 민규에게 손을 내저었다. 나 피곤해, 잘래. 민규가 머뭇거리며 인사한다. 내일 또 보자고. 내일도 같이 놀자고. 

 

 

김민규의 짝사랑 상대를 볼 기회는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학교 동아리에서 단체 해외여행을 가는데, 비행기표가 없어 급하게 일정을 바꿔야 한단다. 여권이 지금 당장 급하게 필요하다는데 어째. 버선발로 달려나간 민규가 상식의 다마스에 올라탄 채 석민에게 손짓했다. 가자 석민아! 도시 구경!! 됐다고 고개를 저었는데도 코웃음을 친 민규는 차에서 훌쩍 내려 석민의 등을 떠밀었다. 맛있는 거 사준다고~ 어이가 없어 물었다. 너는 왜 자꾸 나를 데려가려고 해? 진지한 질문이었는데 실 없는 대답만 돌아왔다. 혼자 가면 심심하잖아.

 

상식은 둘을 시내에 떨궈놓고 근처 철물점으로 향했다. 마을의 유일한 철물점을 운영하는 상식은 종종 산을 넘어 도시의 것들을 들어오곤 했다. 절로 덩그러니 남게 된 석민은 민규의 뒤를 쫓았다.

 

종종걸음으로 따라간 민규의 학교는 석민이 다니던 곳보다 네 배는 더 컸다. 야구부가 있다더니,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이 광활해 보이기까지 한다. 민규를 따라 건물로 들어가니 방학 중인데도 학생 여럿이 보였다. 자습실이 개방되어 있어 고등학교 3학년 애들은 학교에 두엇 나온단다. 선택지가 있는 삶이라니, 졸업과 동시에 가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산 너머의 친구들과는 결이 다른 삶에 괜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민규는 지나가며 마주친 사람들에게 살갑게 인사하다가, 누군가를 보고 멈칫 멈춰 섰다. 나도 가끔 저 멀리서 걸어오는 김민규를 보면 얼어붙곤 하는데.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걸 이렇게 깨닫고 싶지는 않았지만. 

 

쟤구나, 네가 좋아하는 애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난 김민규를 다 아니까. 말갛게 생긴 남자애다. 얼굴이 동글동글 눈도 동글동글. 척 봐도 귀엽게 생겼다. 언젠 내가 제일 귀엽다더니, 질투하기도 민망하게 진짜 제대로 귀여운 애를 옆에 끼고 있었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남자애가 천천히 다가온다. 여기 애들도 서울사람들이 보면 촌스럽다 할 지 모르는데, 나 같은 진짜 촌놈은 어떻게 보이는 거지.

 

"내가 얘기했지? 내 소꿉친구, 이석민.”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엄청 오래 된 친구라고.." 

 

해맑게 웃은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어색하게 대답하며 맞붙잡았다. 부드러운 손에서 기분 좋은 핸드크림향이 풍겨온다. 너 점심 먹었어? 민규가 물으니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아직인데, 그럼 우리 같이 밥 먹을래? 이런 젠장 눈치 없는 김민규. 첫사랑의 썸남에게  라고 소개당하고,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은 걸로 모자라서 겸상까지 해야 한다니. 새삼 민규를 좋아하는 제 처지마저 안쓰럽게 느껴졌다. 왜 이런 멍청이를 좋아해서 이 꼴을…

 

학교 근처의 작은 분식집 문을 열어젖히자 기분 나쁜 쇳소리가 울린다. 민규가 자리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주문을 하고 그 옆에 앉은 남자가 수저를 놨다. 멀뚱히 앉아있는 석민의 뒤를 지나쳐간 민규가 앞치마 두 개를 꺼내 온다. 석민은 제 앞에 내밀어진 앞치마를 가만 보다가 하마터면 눈물을 터트릴 뻔했다. 내가 하다하다 좋아하는 놈 썸 타는 광경을 눈앞에서 직관해야겠냐고. 둘이 자주 오던 단골 가게인지 역할분담이 확실하다. 맡은 일이 없는 석민은 눈만 굴리며 둘을 구경했다. 사람을 좌절하게 만드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작은 앞 접시에 소금을 덜어낸 민규가 석민의 앞에 둔다. 얘는 순대 소금에 안 찍어 먹는다? 신기하지. 중얼거린 민규가 바보같이 실실 웃었다.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금세 나온 떡볶이와 순대를 셋이서 흡입하듯 들이켰다. 맛은 있었다. 좀 이따 다 토할 것 같아서 그렇지. 빨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만 컸다. 우리 이번에 일본 가잖아. 석민이 너는 뭐 필요한 거 없어?

 

석민은 겁이 많다. 물론 어두운 길목이나 공포영화 같은건 민규도 만만치 않게 무서워 하지만, 그런 것 보다도. 석민은 늘 미움 받을 용기가 부족했다. 부모님과 한 판하고 집을 나오는 거? 상상해본 적도 없다. 석민의 유일한 일탈은 민규의 옆에 있기 위해 노력하는 거였다. 같이 도망가자, 하고 내밀어진 손을 잡은 거. 걔를 따라 산을 오르던 거. 그 이상의 반항은 없었다. 만약 그 산을 함께 넘었다면 나도 이렇게 살 수 있었을까.

 

필요한 거 없어. 난 너만 있으면 돼. 네가 산을 넘어 자유를 찾기 전, 허구한 날 내 옆에 다가와 기대던 것처럼. 예전처럼 나한테 다시 기대주면 돼. 내가 바라는 건 언제나 그거 하나 뿐이다.

 

민규가 화장실에 간다며 몸을 일으켰다. 남자와 둘이 남게 되자 어색한 기운이 스멀스멀 퍼졌다. 김민규 매너 없는 자식.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저기.. 민규랑 소꿉친구라고 했죠? 몇 년 지기?"

"...한, 17년정도 됐어요."

"와.. 그럼 민규에 대해서 진짜 잘 아시겠네요, 그쵸?"

"..그건 왜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투가 새어 나가자 지레 놀란 석민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말을 잇는다.

 

"민규 뭐 좋아하는지 알아요? 제가 걔한테 고마운 게 좀 많아서.. 선물이라도 하려고 하는데 뭘 좋아할지 몰라서요.."

 

아, 이거 비밀이에요! 귀엽게 덧붙인 남자가 입을 가리고 큭큭 웃는다. 글쎄, 김민규를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건 분명 나일 테지만. 잘 모르겠다.

 

민규는 그쪽이 좋대요.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예의는 둘째치고 내가 구차하고 힘들어서 그렇게는 못하겠다. 민규는 저랑 같이 하는 캐치볼을 좋아해요. 농구공 튀기는 것도 좋아하고. 그렇다고 잘한다는 뜻은 아니고요. 가끔 같이 핸드폰 게임도 하는데.. 그것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에요. 항상 제가 이기거든요. 집에서 혼자 뭘 만들어 먹는 건 좋아하는데, 주로 한식? 제과제빵에도 소질은 있어 보이는데 성가시다고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한테 선물하는 순간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구요. 걔가 뭘 만들어 가져다주는 사람들 중에 제가 제일 맛있게 잘 먹는대요. 저한테 먹을 거 해주는 걸 제일 좋아하는 애에요 걔는.

저도 걔 생일 때 마다 너 뭐 갖고 싶어? 하고 항상 물어보는데요, 항상 필요한 게 없다고 그러더라구요. 한번은 작은 쿠키를 만들어줬는데 그걸 제일 좋아했던 것도 같고… 걔는 그래요, 값비싼 명품보다는 긴 손 편지 같은 걸 더 좋아하는 애에요. 저는 걔의 그런 점이 제일 좋아요.

 

내가 보살도 아니고, 줄줄이 다 읊어주면 병신이게. 심술이 나 아무말이나 뱉었다. 민규.. 여자 좋아해요. 예상한 범위의 대답이 아니었는지 남자가 눈알을 굴리며 당황한 티를 낸다. 병신 머저리 같은 이석민. 그게 뭐냐 구차하게. 

 

잠시간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 남자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 모퉁이의 결이 나간 나뭇자락을 뜯어내고 있었고, 석민도 구태여 말을 붙이지 않았다. 민규가 빠른 걸음으로 돌아오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표정을 갈무리한 남자가 맑게 웃어 보인다.

근처 카페에서 쉐이커 세 개를 사 들고 거리를 거닐면서 김민규의 연애 스타일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차가 오면 남자를 끌어 안쪽으로 민다. 예민하게 차도를 노려보는 민규의 뒷모습이 지나치게 든든해서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어딜 들어갈 때면 문을 잡고 남자를 먼저 들여보낸다. 인파 속에서 휘청거릴라치면 손목을 덥석 잡아 제 뒤로 감싸는데 그게 미칠 듯이 부러워서 또다시 울컥.

 

  

 

민규의 자취방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 민규는 석민에게 손을 휘저었다. 데려다주고 올 테니 먼저 들어가 있으란다. 싫다고 떼를 써봤자 달라질 건 없을 테니 얌전히 돌아섰다.

띵- 낡은 엘리베이터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산 너머에는 다섯 개의 마을이 있다. 우체국과 농협이 있는 중심지에는 없는 게 없었다. 불필요한 바깥 걸음은 쉬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른들이야 결혼식이며 장례식이며 오가는 일이 종종 있다지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이 산을 넘어 뭘 하겠나. 석민의 학교 친구들 중에는 단 한번도 산 밖으로 나서 본 적 없는 애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민만은 종종 산 너머로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여전히 그가 민규의 짝꿍이기 때문이다. 석민이 네가 민규 좀 잘 다잡아줘. 마을 어른들의 위선같은 우려를 들으면서. 가물가물한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집안은 공허하기까지 했다.

 

김민규가 자주 뿌리는 섬유유연제향이 나는 옷장. 김민규가 좋아하는 과자가 가득 찬 서랍장.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다 문득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라 배시시 웃었다. 나랑 결혼할 거라고 떼 쓰던 일곱 살의 김민규. 내년이면 민규와 석민은 성인이 된다.

‘우리 스무 살에 결혼하자! 엄마가 그래도 된대. 나는 진짜 너랑 평생 살고싶어 석민아.’

 

새끼 손가락까지 걸어가며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여전히 그 약속은 유효할까. 텅 빈 집안 한쪽에 걸린 민규의 교복 옷자락을 조심스레 쥐었다. 이미 저만치 가있다. 다른 교복을 입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이럴 줄 알았으면 너를 보내지 않았을 걸.

 

해가 다 저물어갈 즈음 돌아온 민규와 치킨 한 마리를 시켜 먹었다. 친구네 집에서 자게 됐다는 상식의 문자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또 술 마시나 보네. 같은 생각을 했는지 미묘한 표정의 민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이불 어딨어?” 

“어? 아..! 야 나 그거 세탁소에 살균 맡겼다.”

“….어?”

“뭐 어때. 침대에서 같이 자자.”

 

청천병력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버리는 민규의 뒷모습을 보다가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너 나한테 왜 그래 진짜… 그래 뭐, 이불이 없다는데 어쩌겠나. 목 돌아가게 땅바닥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민규와 나란히 누워 옛 얘기를 꺼냈다. 기억의 첫 시작부터 함께였기에 할 얘기는 차고 넘쳤다. 무덤까지 가져갈 소꿉친구의 비밀이나 스스로도 떠올리기 힘든 흑역사를 늘여놓자니 기분이 절로 싱숭생숭하다. 우리가 벌써 곧 성인이라니, 신기하다. 그치? 성인이 되고도 너는 다시 산을 넘을까? 네가 떠난 후로 나는 너의 여름만을 기다리며 사는데. 내년부터 여름이 사라져버리면 나는 어쩌지.

 

어른들은 영원한 관계는 없다고 말한다. 사람은 미래를 얘기할 때 반짝반짝 빛나는 법인데 옛 친구일 수록 과거에 머무르게 되니까, 결국 서로를 위해 멀어지는 거라고.

 

문득 궁금해졌다. 얘의 미래에 내가 있을까.

 

말을 하다 말고 스르륵 잠이 든 민규가 뒤척인다. 팔목 언저리에 민규의 차가운 손이 닿아 흠칫 떨었는데, 아예 몸까지 휙 돌려 안겨온다. 내가 죽부인도 아니고… 힘을 줘 꽉 껴안은 자세로 목덜미에 코를 박는다. 불규칙적인 숨결에 움찔거리자 민규가 더더욱 깊게 파고든다. 강아지 털 같은 머릿칼이 볼가를 간질였다. 그만해, 제발. 슬쩍 밀어내 봤지만 깊게 잠든 민규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단단한 팔목을 힘주어 붙잡아 봤다. 고개를 돌려 가까운 거리에서 터져 나오는 숨소리를 가만 들여다 봤다. 그리고 붉게 오른 입술을 보다가..

잠깐 닿았다 떨어진 입술에서 낯부끄러운 소리가 난다. 두 눈 앞의 신에게 빌었다. 제발 나도 돌아봐 달라고. 늘 그랬던 것처럼 내 몫의 민규로, 내 옆의 민규로 머물러 달라고. 그게 민규에게 조금도 도움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차라리 날 이용해. 내가 널 이렇게 좋아하잖아. 석민은 민규가 자신을 싫어하기라도 했으면 했다. 그럼 두고두고 생각날 거잖아. 무플보다는 악플이라고, 무엇보다 두려운 건 민규의 무관심이다. 그냥 지금 당장 눈을 떠 왜 자는 사람한테 입을 맞추고 있냐고 역정이라도 냈으면 싶다. 

 

다음날 마을로 돌아가는 길, 상식의 차 뒷자리에 앉아 민규의 뒷모습을 한참 뜯어봤다. 뒤통수마저도 잘생긴 김민규. 어젯밤 꿈처럼 잠시 닿았던 입술을 떠올리니 귓가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구질구질한 마음이다. 네가 이런 내 마음을 몰랐으면 좋겠다가, 눈치채길 바랬다가. 확신 없는 감정의 골만 깊어진다.

 

 

 

우리 정말 정말 어릴 때 있잖아.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적지 못할 때. 그때도 네가 날 구해줬었는데 기억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질 뻔한 걸 네가 잡아줬잖아.

 

중딩 때 양아치들한테 삥 뜯기고 맞을 뻔한 걸 구해준 것도,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도록 나를 찾아다녔던 것도. 굳이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무리를 하다가 다친 몸으로 나를 업고 산을 내려왔던 것도. 그 뒤에 몇 주 동안 밥도 못 얻어먹고 갇혀 지내면서도 내 탓 한번 하지 않았던 것도. 고마운 일 투성이다. 네가 떠난 직후, 어른들이 나보고 웬 다섯 살 짜리 애랑 약혼하라는 걸 네가 듣고 깽판을 쳤잖아. 이석민 건들지 말라고. 다 불태워 버린다고. 그날만큼 네가 든든했던 적이 또 없었는데. 가끔은 그 놈의 산신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걸 믿지 않았더라면 나를 네 옆에 꼭 붙여놓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게 아니더라도 나는 분명 너를 좋아하게 됐겠지만. 

 

걔를 좋아하는 일은 곧 죄책감이 된다. 언제나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는 민규에게 겁 많은 나는 그저 짐일 뿐인 것 같아서. 네가 좋아하는 그 애는 참 해맑더라. 새처럼 가벼워 보였다. 언제든 민규를 따라 비상할 수 있을 만치. 스스로 발이 묶은 나와는 다르게.

 

넓은 세상에서 트인 하늘을 보는 민규는 두려울 게 없는 사람처럼 매일같이 날아오른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석민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마을 사람들은 전부 저 산에 신이 있다는데 글쎄. 내 신은 여기 있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귀신같이 나타나 나를 구하는 김민규. 그러고선 홀라당 떠나버려 기어코 나를 울리는 김민규. 쟤 하나를 믿어 살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름을 기다리면서. 미련한 사람은 남들보다 더 긴 계절을 보낸대. 가을이 오고 겨울이 지며 온 나무가 앙상해지는데 내 눅눅한 마음만은 저물 줄을 모른다. 

  

민규와 잘 익은 수박 하나를 서리해 몰래 까먹었다. 속이 빨갛게 들어찬 게 서울서 팔면 한 통에 이만 원은 족히 넘을 것 같다. 낄낄거리면서 수박 씨를 뱉으며 놀다가도 민규의 손이 닿으면 석민은 흠칫 몸을 떨었다. 딱 이번 여름까지다. 다음 계절부터는 너 좋아하는 일 없어. 제멋대로 정한 마지노선은 맥시멈을 꿈꾸게 했다. 마지막이니까, 조금 더 솔직해도 되지 않을까? 민규네 아버지의 산삼주를 몰래 빼먹던 날에는 넓은 가슴팍에 기대도 봤다. 석민은 취하지 못했는데, 글쎄. 김민규는 어땠을는지.

 

민규의 썸남과 영상통화도 했다. 지난번에 심술부렸던 게 맘에 걸려 눈도 마주치기 민망했지만 민규가 하도 친해지길 기대하는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어서 하는 수없이 해맑게 인사도 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하루를 보낸다는 건 이렇게나 짜릿한 일이다. 시간이 훌쩍훌쩍 지나갔다.

 

어느덧 민규의 여름방학이 끝났다. 마을 정자에서 수박을 까먹고 뒹굴던 시간은 찰나다. 바지를 걷고 계곡에 풍덩 빠져 다슬기를 잡던 날도 금세 과거가 됐다. 차곡차곡 짐을 싸드는 민규를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네가 오는 계절이 여름이라서 참 다행이다. 내가 조금 울어도 땀이라고 둘러댈 수 있어서. 눈시울이 붉어져도 덥다며 부채질을 할 수 있어서. 두툼한 백팩을 잠군 민규가 선풍기 앞에 앉아 아- 소리를 낸다. 제 옆에 앉으라며 손으로 툭툭 바닥을 친다. 쪼르르 달려가 옆자리에 앉자 머뭇거리더니 손을 뻗어 귀를 감쌌다. 더운 숨소리가 목덜미를 간질였다.

귓가에 속닥속닥 들려오는 김민규의 목소리. '나는 항상 거기 있으니까..' 여름의 끝을 알리는 말이다.

 

혹시라도 힘들면 나한테 와, 언제든.

 

의미 없이 달콤한 말에 눈물이 차올랐다. 뭐든 잘하는 너는, 뭐든 다 아는 너는 도대체 왜 내 마음만은 모르는지. 다음 생엔 너로 태어나 평생 여름에 머무르고 싶다. 네가 언젠가는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떠나는 뒷모습에다 대고 소원을 빌었다. 내년 여름은 무지무지 길었으면 좋겠어요. 스무 살이 되어 돌아온 김민규가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물 수 있도록.

 

만약 그 산신이 정말 있다면, 진짜로 있다면. 한 번 쯤은 나를 일으켜줄 수 없는 건지. 듣기는 하는지, 정말로 있기는 한 건지. 고요한 산턱은 대답이 없다.

 

사랑은 구원의 다른 이름이다. 언제나처럼 뻗어져오는 굵직한 손을 보며 체념했다. 나는 너 없이 살기엔 글렀구나.

내 첫사랑은 하필 여름을 닮아 계절마다 푸른 초록빛을 낸다. 개구리 뛰어노는 소리가 들릴 즈음이면, 매미가 울기 시작할 즈음이면 고개를 빼 들고 걔가 오는 길목을 들여다봤다. 다음은 없으면 어쩌지. 여름이 사라져버리면 어떡해. 네가 다신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어쩌지.

두려움 속에서 여름이 진다. 너를 닮아 푸르른, 너를 담아 든든했던 여름이 기어코 진다. 여기에 나만 남겨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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